2022년 1월 9일 주현 후 제1주 (2022년-02호)

제목 : 너는 내 것이다

본문 : 이사야 43:1-7, 사도행전 8:14-17, 시편 29편, 누가복음 3:15-17, 21-22

【이사야 43:1-7】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쓰바를 내주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

-인사

주 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은혜로 돌보아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시다시피 프랑스 내 코로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우리는 현재 비대면 예배를 우선 2주일 간 진행하려 합니다. 여러분, 코로나 상황을 2년 보내면서 저는 이런 저런 염려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당장 성도들의 사업장에 닥칠 위기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장 생활 하시는 분들의 감염에 대한 염려, 경제적인 불안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학업 중에 있는 청년 성도들이 꿈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의 현실적인 문제인 예배와 모임의 어려움이 무척이나 염려스럽습니다.

-우리의 현실

지구상에 아직 사람과 접촉하지 않은 바이러스가 수백 종에 달한다는 과학적 보고가 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이 바이러스들이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어떤 다른 종류의 전염병 팬더믹이 불어 닥칠 지 그 규모를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연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멋대로 훼손하는 일을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훼손을 정당화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창세기 1:28의 말씀입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특히 “땅을 정복하여라.”는 말을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익에 따라서 맘대로 해석하고 자연을 훼손한 결과가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현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신앙적인 발언같이 들리지만 정말로 신앙적인 말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사람들을 겁주는 주장을 하기 이전에 우리 인간이 세상과 자연에 저지른 일들을 살펴보고 돌이키는 일이 진정한 신앙의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삶, 즉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과 분리시킨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의 삶과 신앙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실천하는 일은 우리의 생활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은 그 모습은 껍데기만 남은 인생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허무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주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찾으려 애쓰는데 그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창조의 주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성경에 관해서, 또는 성경읽기에 관해서 신앙적인 대화를 할 때마다, 돌이켜 보면 무척이나 제가 자주, 거의 잔소리처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을 각자의 기호에 따라서 취사선택해서 읽지 말라고 자주 말씀 드렸습니다. 내 맘에 드는 말씀, 오늘 내가 듣고 싶은 말씀에 기울이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들을 줄, 또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기도 하고,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표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신앙 행위입니다. 이 일에 열정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펼쳐 놓고 들여다보니 이런 점이 눈에 띕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부터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66권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즉 ‘하나님의 창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늘 이사야의 말씀을 앞에 놓고 서 들었습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셨다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으로 가보십시오. 마지막 때 하나님이 뭘 하실까요? 또 창조를 하십니다. 그 때 만들어지는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이 창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하나님이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도 창조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예컨대 욥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함께 욥기를 묵상했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욥이 어려움에 처했다.’ 이것이 욥기의 처한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한 인간 욥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였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은 사람의 논리와 사람들 간의 상식으로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의 아득한 차원을 제시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욥기 38:4). 하나님의 대답이자 질문입니다.
욥은 그제야 대답을 얻었습니다. 이전에는 인생살이의 답을 귀로 듣기만 했지만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끝없음, 무한하심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깊이입니다.

-이사야의 창조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3:1-7절도 바로 그 창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시대는 기원전 6세기 중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는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치욕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비로소 자신들이 누구인지 영적인 깊이가 더해지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욥의 재앙처럼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수모와 치욕을 당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고 있던 신앙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요, 이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다니요. 하나님이 무능력하든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향해서 쓴 글이 바로 이사야 43장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사야 43장은 영적인 힘이 넘치는 글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창조주, 창조하시는 주님으로 표현했습니다. 사 43:1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 구절을 잘 들으셨는지요?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절실한 마음으로 ‘너를 지으신’ 이 말을 반복합니다. 이 문장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과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분,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요?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면,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손길로 빚어진 존재가 우리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까? 입으로는 시인할지 몰라도 우리의 삶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관찰해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신지는 내 삶의 주인을 누구로 놓고 살아가는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깨웁니다. ‘너의 주인은 누구신지’ 하고 말입니다.

-선하고 귀한 생명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신 주’라는 말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명이 선하고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당연히 선하고 귀합니다. 우리는 선하고 귀하다는 것을 세상이 말하는 기준, ‘선하다, 귀하다’의 의미를 넘어서야 합니다. 선하고 귀한 우리의 생명에다가 덧붙여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유니크함’입니다. 나는 귀합니다. 나는 유일합니다. 나는 지구상에 사는 어떤 사람과도 똑같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찍어내듯이 우리를 창조하신게 결코 아닙니다. 오직 이 세상에 나 하나만 만드신 것처럼 유일한 나를 만드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이 세상에 오직 나 한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나 한 사람만 만드신 것처럼 나는 ‘유일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나를 살지를 못합니다. 나를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새겨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휩쓸립니다. 대부분 돈과 권력과 업적과 관계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최소한 중산층이 누려야 할 삶의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게 주어지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주눅이 듭니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조건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비교할 때 누추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앞에서 세상의 조건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치 거지가 옷 수거함에서 골라잡아 입은 옷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최고의 것을 자기 속에 지니고 있음에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 기준에 휩쓸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너를 지으신 주님’라는 표현 속에는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2절과 3절에서는 그 내용을 좀 더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여기에 나오는 물과 강과 불은 이스라엘 역사와 연관됩니다. 에집트 탈출하고 처음 당면한 어려움은 홍해였습니다. 뒤에서는 에집트 기마병들이 추격을 하고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은 마른땅처럼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이 멈춰서 이스라엘은 무사히 건넜습니다. 물이라는 장애물을 건넜습니다.
불은 전쟁의 참화입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모든 건물이 불에 탔고, 사람도 불에 탔습니다. 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극도의 불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불과 불꽃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족에게 외치는 중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은 일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고난과 재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개인의 운명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과정이 끝납니다. 죽습니다. 죽음이 창조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행이라 여겨지는 일들도 역시 내 인생의 완성을 구성하는 한 부분입니다. 여기 인생살이가 잘 풀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명성을 날리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혼이 더 풍요롭고 빛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재미있고, 배부르고, 즐거운 것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극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난과 불행을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뚫어보자는 것입니다. 그걸 뚫어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런 설명이나 이런 권면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사는 삶이 그토록 초라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내가 사는 시간이란 한 순간에 불과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드넓은 우주의 크기에서 먼지 한 톨에 불과한 나 자신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서 ‘너는 내 것이라.’ 한다는 말씀이 이사야가 지나치게 과장하고 오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똑똑하고 믿음이 좋고 성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고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의 관점이 얼마나 심층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창조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믿는다면 우리가 각각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는 곧 창조의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입니까? 비정한 인간사가 진행되는 곳입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곳이기도 합니다.

-맺음말

교우 여러분, 세상사가 힘겨우시지요? 하루하루 살아내시느라 버거우십니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무게가 무거우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의 조건과 버거운 세상일에 물살에 쓸려가듯이 휩쓸려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리시지 않으시고, “너는 나의 것이다” 하신 말씀에 위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를 얻은 우리가 나아갈 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이 빛나고 아름다운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