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깊은 곳으로
본문 : 이사야 6:1-8, 고린도전서 15:1-11, 시편 138편, 누가복음 5:1-11
【이사야 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 내가 아뢰었다.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
【누가복음 5:1-1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 시몬이 대답하였다. «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인사말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모두 평안하셨는지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4주간의 비대면 예배라는 시간을 보내고 오늘 우리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교우들 간에 따뜻한 인사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대면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봄기운이 천천히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차가워진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녹여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나눕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다시 모이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우리의 모이고자 하는 의지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결정해서 일까요? 우리의 의지나 결정이기 이전에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믿고 싶어서, 혹은 교회에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기 이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점이라는 말입니다. 정말인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이사야, 그리고 베드로 역시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들임이 믿어지십니까?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여러분과 제 마음 속에 주님의 부르심이 절박하고 간절하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의 소명
세상에는 참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어쩌면 일생 한번 정도 스치고 지나가는 만남도 있을 테지만 평생을 함께 교류하며 지내게 되는 귀한 만남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만남 가운데 신앙의 이유 때문에 신앙의 이름으로 만나는 경우가 바로 오늘 우리의 경우입니다.
그 만남들 가운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독특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쁘고 번잡하게 사느라 잊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부르셨고, 또 여러분은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그 생생했던 장면이 과거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때 내가 그랬었지!라고 신앙을 추억의 영역으로 넘겨 버리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많은 부르심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중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서 보면,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모습은 이사야 말고도 여러 차례 성경에 등장합니다만 그중에서도 이사야를 부르시는 장면이 가장 극적이라고 할까요?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뵈었지만 하나님의 모습은 묘사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메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6날개를 지닌 천사들이 서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왕 ‘웃시야’라는 왕이 죽던 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남 유다 왕국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를 대신할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데,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6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단락입니다만 저는 오늘 한 구절만은 우리가 꼭 분명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6:5의 말씀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 사람의 생김새, 분위기, 말투 등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됩니다. 외모를 살피기도 하고, 독특한 말투나 말버릇, 사고방식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가 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우리 모두가 사람을 만날 때 공통의 경험입니다. 그리고나서는 상대가 내게 유용한 사람인지, 다음에 또 만나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인지 여기기도 합니다.
자! 여기서 보십시오.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보십시오. 내게서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 우리의 관심은 나에게서 상대방으로 흘러갑니다. 당연합니다. 내가 상대를 관찰하고 느끼고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시선은 다릅니다.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는데, 시선은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에게 갔던 시선이 돌아옵니다. 어디로 돌아옵니까? 내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하나님 만남의 장면입니다.
-베드로를 부르시다
베드로는 어떨까요? 베드로도 이사야와 아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5:8을 보십시오.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났으니, 주님을 더욱 친밀히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인간사의 이치입니다. 시선의 방향이 내게서 상대에게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을 봄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의 모습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말씀의 장면을 보면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그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아직 가보지 못해서 가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그 땅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유대 땅은 왠지 모르게 생각할 때마다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땅, 그리고 늘 모래먼지가 날리는 삭막하고 불편한 자연 조건을 가진 그런 곳처럼 상상하기 쉽습니다. 사막, 광야 같은 단어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마을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TV 프로그램에서 갈릴리 호수를 보았습니다. 실제로 이 호수의 둘레는 50킬로미터이고, 남북 길이가 21킬로미터, 동서 길이가 11킬로미터라고 합니다. 달걀모양의 호수입니다. 꽤 크지요. 그런데 저의 상상과는 다르게 갈릴리 호수 주변 사람들의 생활은 풍성한 물 자원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많은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는 풍성한 곳으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라는 자연 자원을 통해서 먹을거리를 얻고 마실 물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언제나 손쉽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참 행복하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행복의 조건이 참으로 복잡해졌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갖춰야 하고, 게다가 나 자신과 남들의 삶을 비교까지 해가며 살다보니 참으로 마음이 풍성한 행복감 보다는 늘 허기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 호수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그래도 먹을 것을 고기를 잡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갔습니다. “벳세다-가버나움-게네사렛-막달라-티베랴” 예수님이 지나다니시던 지명들입니다. 이 모든 지명이 갈릴리 호수를 빙 둘러싼 마을들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갈릴리 호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아주 중요한 자연 자원이지요.
그런데,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과연 먹고 살만 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세금입니다. 어부 한 사람마다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잡는 물고기량으로 세금이 또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썩지 않게 소금을 쳐야 되는데, 이것을 관리하는 염장마다 세금이 또 부과됩니다. 그러면 실제 수입은 어떨까요?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게 됩니다. 팍팍하고 어려운 어부의 삶입니다.
-깊은 곳으로
오늘 말씀 3절을 보십시오.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밤새 고기를 한껏 잡아 올려서 기분이 좋은 어부들의 모습처럼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5절을 보면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얻은 소득은 없는 어부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밤새 허탕을 친 어부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라는 어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새로운 어업 기술’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 오늘 말씀을 읽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특별한 능력(어군 탐지기)이 있어서 물속의 고기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입니까? “자신의 깊은 곳, 삶의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어부들, 그리고 그 가족들, 그 이웃들은 한 번도 삶의 깊은 곳을 살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에 그런 깊은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의 깊은 곳으로 나가라”는 부름을 들어보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깊은 곳은 “바쏘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쏘스”는 심연입니다. 아주 깊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바닥이 없는 심연을 뜻합니다. 바닥이 없는 깊은 바다는 한마디로 말해서 미지의 장소이고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곳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속에 참된 내가 있으니, 나 자신이 있으니 그곳으로 내려가면 본래의 나의 모습을 통해서 크신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말 아닐까요?
-어부들처럼 사는 인생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게네사렛 호수가의 어부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밥먹고, 취직하고, 돈벌고, 집사고, 우리가 생각하는 생의 안락함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신앙은 이런 차원의 삶이 우리 생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삶은 몇 층으로 되어 있냐는 말입니다. 어부들의 삶은 1층만 있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는 1층만 있는 것이 아니라 2층, 3층의 삶도 있고, 깊고 깊은 곳, 묻혀져 있는 곳, 숨겨져 있는 곳이 있으니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믿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삶의 차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삶의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로운 탐욕과 이익의 관계로 얽힌 내 인생을 보게 됩니다. 밥벌이에 급급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내 인생을 보게 됩니다. 세상사의 갖가지 일에 얽혀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내 인생을 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가끔씩 내가 외로울 때만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유용한 분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내 인생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깊은 곳으로 가라 하십니다. 깊은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