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 : 신명기 26:1-11, 로마서 10:8b-13, 시편 91:1-2, 9-16 누가복음 4:1-13
【로마서 10:8b-13】
«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누가복음 4:1-13】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입에 붙은 형식적인 인사말인 “안녕하세요?”처럼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지만 ‘평화’라는 이 말을 정말 간절히 원하고,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장의 한 가운데서 폭력과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특히나 여성과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고 합니다. 2015년 노벨 문학상 작품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입니다. 하루 빨리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 임하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예언자 미가라는 이가 있습니다. 미가 4:3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한 바를 주목해 보면, 하나님의 때는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을 녹여서 사람을 살리는 농작물을 일구는 도구로 변하는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 말씀이지만 말씀이 살아있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평화이심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사순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세계
우리가 가진 신구약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제 말이 맞지요? 모두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이 말에 대해 우리가 자주 범하는 생각의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데, 그런데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이것을 오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내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한 계시록이나 다니엘서 같이 신비로운 상징이나 환상을 담고 있는 책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계시록도 다니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성경은 없습니다. 계시록은 처음 교회 시대에 로마 황제의 교회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역시 페르시아와 헬라 문명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신앙을 갖고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 하나로 나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니 구체적인 내 삶과 깊이 관련이 있는 것이 맞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평범한 언어로 진술된 바울의 편지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예수를 구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생겨난 그 즈음에 바울이라는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 이 사람이 로마 교회 공동체에 편지를 한통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가 남아서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밀접히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의 세계
자 이렇게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 녹아있는 로마서를 읽으면 그 당시 초기 교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배경은 유대교입니다. 우리에게는 유대교가 무척 낯설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유대교라는 영적인 배경에서 자랐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탓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도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대교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로 자리를 잡았지만 초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할 미묘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는 아주 강력하게 유대교와 전혀 다른 복음의 세계를 제시했습니다. 바울 덕분에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지 않게 된 셈입니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본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된 단어가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사람들이 식상해 하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불편해 하구요.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차원에서 머물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과 자조를 하게 됩니다.
이 구원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대답을 내놓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로마서에 그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그의 출신 배경은 유대교입니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고, 철저한 유대교인이라는 사실은 그가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추종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핵심 주장으로 이 말을 짚었습니다. 롬 10:5절에서 레 18:5절을 인용하여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이 말은 율법 실천으로 인한 의(의로운 사람)는 단순히 종교 차원이 아니라 오늘 문명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실정법을 비롯하여 교육과 노동과 정치와 사회제도가 기본적으로 법적인 질서이자 율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실천하면 개인이나 사회가 의로워진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뒤로 율법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사실을 그는 롬 10:4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
“율법의 끝마침”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현실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대체했다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 시절에 딱지치기에 열을 올리다가 철이 들면서 딱지치기에 흥미를 잃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부정했다거나 윤리 도덕적인 행위를 폐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덕적 방종을 허락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성실한 삶의 의미,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삶의 성과물들 그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가 새로 찾은 구원의 길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해하셨지요? 새로 찾은 구원의 길,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 신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자리합니다. 개인적인 것이지만 저는 바울을 통해서 구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구원 문제가 단순히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사회, 세상에서의 삶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 본문에 따르면 모세의 율법을 성취해야만 의로워지거나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고 믿고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바울의 생각이 집약적으로 정리된 구절은 롬 10:9절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로 시인하다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는 헬라어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라틴어로는 도미누스라고 합니다. 초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주, 주님이라 불렀고, 초기 기독교 당시 로마 사람들은 황제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생활할 당시 실제 정치의 차원에서는 로마 황제야말로 이런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주’ 시인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귀담아 들었을까요? 아니겠지요. 지금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이는 로마의 황제이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라는 이름 없는 유대 젊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에게 있고, 그가 주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왜 일까요? 바울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바울이 본 것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요?
-입으로 시인하다
왜 입으로 시인하라고 할까요? 입으로 인정한다는 말은 무척이나 무겁고 위중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삽니다. 때로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도 않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던데, 그만큼 자신의 입으로 뱉어내는 말의 무거움이 많이 사라진 시대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살던 시대는 우리 시대와 다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일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는 일이 되기도 하던 시대입니다. 자신뿐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지, 이웃들의 목숨도 내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는 일 하나로 결정될 수도 있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말하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걸고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은 중대한 일입니다. 다시 생각하고, 다른 것들을 고려하고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일은 이런 일입니다.
-마음으로 믿다
바울이 말한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도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예수 부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거도 없습니다. 로마가 이룬 업적(건물과 제도)과 로마의 강대한 군사들(폭력의 힘)은 눈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배할 권력을 지닌 로마의 황제는 버젓이 눈앞에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걸 믿으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부활이 믿어지시나요? 아닌데도 억지로 믿으시는지, 아니면 믿는 시늉만 하는 건지요.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심중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는 일과 마음 없이 하는 일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그 중심이 무엇인지 압니다.
-말씀을 믿는가?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의 최고 권력 치하에서 살지 않습니다. 로마의 권력, 그런 것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는 로마의 황제도 없고, 로마의 강력한 권력이나 권세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없을까요? 우리는 그 로마의 권력과 업적과 비견되는 또 다른 업적과 권력을 그 어느 때보다 숭배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화려함을 추구하는 삶을 최고의 인생이라고 숭배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크고 화려한 업적이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초라한 예수가 아니라 크고 화려한 것, 더 힘세고 나를 뒤흔드는 것에 사로 잡혀서 그것을 믿으며 고백하고 시인하며 산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위대함을 삶의 중심에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2000년 후에 당신들의 권세나 권력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남을 것입니다.”고 말하면, 그곳에 있는 그 사람들이 우리 말을 믿기나 할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앙하고 받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전부인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내 삶을 주관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로마의 권력과 로마의 힘과 로마의 업적입니다. 우리는 그 권력과 힘과 업적을 추앙하는, 사실상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4장 예수께서 시험 당하신 말씀 우리가 잘 압니다. 많이 듣고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당하신 그 시험,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인생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빵의 문제입니다. 빵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지만 모든 것을 빵으로 바꾸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시험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 권세가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높고 높음에 취하고 그 화려함에 도취되어 악마에게 절을 해서라도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주어진 두 번째 시험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오만과 뽐냄, 자랑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 놓인 시험들이 이 세 가지에 다 포함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다룰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순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