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사순절 제3주 (2022년-12호)

2022년 사순절 3주일예배

제목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본문 : 이사야 55:1-9, 고린도전서 10:1-13, 시편 63:1-9, 누가복음 13:1-9

【이사야 55:1-9】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내가 그를 많은 민족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많은 민족들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다. »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올 것이니, 이는 주 너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인사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사순절 3주일 예배로 모인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먼저 서로에게 깊은 존중과 또한 사랑을 담아 인사합시다. 서로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를 저버린 교회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믿는 차원’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생각과 행동으로 따르기를 결심하는 이 복된 절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평화가 필요한 곳에 여러분을 마음, 생각, 작은 실천을 보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람들

오늘 우리가 예배를 위해 봉독한 말씀 잘 들으셨는지요?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오늘 먼저 봉독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게는 ‘목마른 사람’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 단어를 마치 손에 쥐듯이 이렇게 품고서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안에는 온통 ‘목마른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라는 여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그야말로 어린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여인이었고, 아들과 함께 죽을 운명에 놓였던 여인입니다. 마실 물이 없어 죽기 직전에 놓인 아들을 품에 안고 울부짖는 여인 하갈의 이야기,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어미, 한 인간의 비참한 실존입니다. 이 모자에게 정말로 당장 필요한 것은 그 생명을 살리는 한 모금의 물과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휴식처일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 역시 마실 물이 없어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온 여인의 이야기,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의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물질로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에 대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또한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렇듯, 보기에 실제로 육체가 목이 마른 경험의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 우리의 찬미 시편인 63편의 시인의 노래처럼 “물기 없이 메말라 황폐한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이 아니라 주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육체만 갈증을 느끼고 목만 마른 경험 있다면 성경에 등장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럴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육신의 갈증은 해소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성경에 목마른 사람들이 등장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건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갈망하는 갈증이란 영적인 갈증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참 목마른 사람들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렇게 많다는 말은 그만큼 흔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시대를 건너 계속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곧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마름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

여러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염려가 됩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결핍감, 공허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결핍감 없이, 그야말로 단 하나의 결핍감을 느낄 새가 없이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목마름은 존재합니다. 이것은 어딘가 삶의 어딘가가 비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공허감을 채우려고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허기를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신앙의 시작은 “목마름”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만이 아니라 세상사를 보면서, 목마른 사람 이야기를 만나게 될 때, 우리에게 드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제게 드는 첫 감정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안타까움이 드는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나만 목마른 존재인 줄 알았는데, 너도 목마른 영혼이었구나”하고 같은 감정의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을 ‘동감’한다고 하지요?
또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마음 한 구석이 아립니다. 마음이 아파옵니다. 왜 마음이 저려오고 아픈가 하면 목마른 사람들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목마름 속에서 내 목마름을 보고, 타인의 아픔 속에서 나의 아픔의 근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민낯을 보지 못합니다.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타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신앙적인 일입니다.
하나 더 말하자면, 목마른 사람들 이야기의 마지막은 늘 감동적입니다. 왜냐하면 목마른 사람들 이야기는 어떤 한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 사람들만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 공동의 감정입니다.

-이사야의 시선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아주 분명하고 단호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부르는데, 우리를 이런 존재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물로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우리의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시킬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하지만, 하지만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 이해와 전혀 다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돈으로 매겨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단연코 하나를 들자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따뜻함입니다. 이것은 값이 없습니다. 모두가 돈.돈.돈 하는 세상에서 이것이 가능한건가요? 여러분 이 진리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이사야는 대조적으로 지적합니다. 우리가 얻지도 못할 양식을 위해서,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돈을 지불하고 수고를 한다고 이사야는 지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의 모습에 대한 지적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비참합니다. 뭔가 배고픔도 느끼고, 뭔가 갈증도 느껴서 돈도 써가면서, 수고도 해가면서 우리의 삶을 투여해 왔건만 우리의 갈증과 허기는 전혀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실상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사야는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그리고 그가 이 말씀을 전할 때 그가 처한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먼저 이사야의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신세에 놓였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현재 지금 4-50년을 보낸 상태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선민’인 자신들을 특별하게 지켜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날벼락처럼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 다윗 왕궁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성전과 궁 안에 있던 값진 집기들도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유대 공동체가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유대 지도급 인사들은 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나머지 유대 백성들은 초토화된 유대 지역에 남아서 바벨론 관리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한 뒤에 이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유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여호와 신앙을 붙들고 있었지만 대다수는 포기, 냉소, 무신경으로 떨어졌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봐야 별로 잘되는 일이 없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냉담 상태에 들어갔다가 급기야는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에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문명이 자신들의 문명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고,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한 때 미국 이민이 한창이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미국에 가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잘만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학문, 종교의식, 문화 등은 식민지 백성들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찾거나 부를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이 없어도 바벨론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선포한 이사야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그는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이고, 여호와가 가까이 계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동의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무기력한 하나님으로 판명된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언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자기 민족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를 다시 찾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전혀 먹히지 않는 주장입니다.

뭔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 특히나 우리 신앙생활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다 보이지는 않지만 언뜻 한 부분, 한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이사야의 호소

그렇다면 이사야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외친 걸까요? 새롭게 부상한 신흥 제국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결국 패망시키고 유대가 다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우리의 일제시대를 돌아보십시오.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바는 처음 강제 합병되었을 때는 적지 않은 지도급 인사들이 독립을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노력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제치하에서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일제가 대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밑에서도 그런대로 살만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힘이 떨어지는 걸 어느 정도 눈치 했지만 일본이 망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행각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단지 국제정세만 보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선포한 게 아닙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영혼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사야가 볼 때 유대인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헛된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헛배가 부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헛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헛것은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할 뿐입니다. 이사야가 볼 때 하나님을 완전히 외면하고 바벨론 문명에 푹 빠져버린 유대인들의 삶이 바로 헛된 일이었습니다. 바벨론 문명이 아무리 화려해도 참된 양식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속에 함몰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길들여졌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질식 상태입니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에 편승하거나 숭배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의 물질 숭배적이고 자기 숭배적인 자본주의는 2천5백 년 전 바벨론 문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게 옳은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이 잠든 것입니다. 앞으로 2천년 후에 우리 후손들은 지금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씀을 앞에 놓고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기존질서에 길들여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그들이 망각했던 종교적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문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바벨론 포로 시절의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선포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찾고 불러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3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이 말씀을 진실로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사순절 3주일에 간곡히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