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버지와 두 아들
본문 : 여호수아 5:9-12, 고린도후서 5:16-21, 시편 32편, 누가복음 15:1-3, 11b-32
【고린도후서 5:16-21】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3, 11b-3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 4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주일을 맞아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하십시오.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에 함께 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도 마음을 나눠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전쟁의 공포가 여전합니다.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전쟁을 굳이 해야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단 하나도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슬픔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빨리 전쟁이 그치고 참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날씨가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얼었던 우리를 녹이는 봄날이 찾아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서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마치 주인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주인의 말씀에 귀를 세우고 있는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말씀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 가운데 한 단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그 단어는 ‘화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화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 성경에는 이 단어가 ‘화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영어나 프랑스어 표현은 모두 화목보다는 ‘화해’라는 뜻이 강합니다. 아마도 화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답게 지내는 걸 가리켜서 화목하다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목한 가정’이라는 표현을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불화했던 상황이 해결되는 걸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불화했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난히 화해를 많이 언급합니다. 특히나 우리의 화해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바울 사도의 간곡한 호소가 오늘 우리에게 깊이 와 닿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높은 곳에 계신 분,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가 가끔 필요한 요구를 할 때 필요한 분 정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십니다. 가끔 찾아와서 뭔가를 요구하는 아들 같은 존재가 우리라면 그 요구를 듣고 계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만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슬프실 겁니다. 안타까우실 겁니다.
-15장 이야기의 시작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당연히 잘 아는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칭할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제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누가 결정했나요? 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결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 속에 담긴 이야기는 너무나도 감격스런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고, 이런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 하신 이유
교우 여러분, 오늘 먼저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전제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1절부터 3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속칭 죄인들과 함께 삶을 나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지요. 이런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울린 사람들이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정치적인 죄인 세리들과 도덕적인 죄인이라 할 수 있는 창녀나 부랑자들과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정결법, 안식일법을 모조리 위반한 죄인들입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따갑습니다. 율법 준수에 철저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의 모습입니다. 죄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혐오의 눈빛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이것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 비유 말씀을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남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십니다.
-둘째 아들
오늘 이 비유는 마치 연극처럼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1막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입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는 어느 집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주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산 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유대인 풍습에 맞는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례를 범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산을 미리 받을 경우에는 돌아가는 몫이 훨씬 작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13절에 보면 작은 아들은 며칠 뒤에 자기 몫을 다 챙겼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 몫을 다 챙기는 둘째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들뜨고 설레였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이 그에게 손짓”하는데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 젊은 청년에게 큰 돈이 주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상이 있었을 것이고, 세상살이에 대한 경험 없음과 분별없음을 아버지는 아셨겠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들의 선택은 아버지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자유는 아버지와 단절인 셈입니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피하고, 숨고. 이것을 인간의 자유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본질을 잃다
연극의 2막은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한번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야망을 품었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던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유혹이 더 강렬합니다. 그는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불어 성경에는 “방탕한 방법으로”라고 표현되어 있고, 영어 성경에는 “시끌벅적한 방법으로”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가진 것을 어떤 방식으로 탕진했는지 족히 짐작이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아들이 탕진한 재산을 “돈, 금전, 재산”등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우시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여러분 ‘우시아’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말로 하면 ‘본질’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은 돈 얼마가 아닌 것입니다. 아들이 탕진한 것도 돈 얼마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신 자기 자신인 ‘본질’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이가 무엇을 의도하는 지 이해가 가십니까?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잃을 것은 돈 몇 푼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 전부라는 사실을 은근히 전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자유를 선택해서 아버지를 떠났지만 그가 얻은 것은 자유는 고사하고 본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다가오는 것은 가짜 본질입니다. 가짜가 진짜인 척 인간을 차지합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이 에덴의 동편으로 갔다고 하지요? 에덴의 동편은 우리 인류가 본질을 잃고 헤매는 곳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둘째 아들은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일터가 돼지 농장이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입니다. 둘째 아들의 형편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를 면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안 됐습니다.
-돌아가기
이 때 그에게 ‘대전환’과 같은 일이 생깁니다. 이 생각은 누가 밖에서 강제로 주입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서 발생한 생각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계신 집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
아버지의 집에 있었을 때가 자유를 속박당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를 떠난 존재가 본질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의 종들마저 자신 보다 자유로운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17절에 “그제서야 그가 제 정신이 들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든 아들이 할 단 하나의 일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드릴 말씀을 준비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인 본질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의지가 보입니다. 이 의지는 하나님의 품을 깨달은 인간의 용기입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형님을 뵐 것입니다. 그 때 자신에게 찾아올 것을 보십시오. 두려움, 부끄러움, 면목 없음이 있습니다. 종들이나 이웃 사람들은 자신을 두고서 수군댈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본질, 아버지에게로 나가고자 하는 용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두려움 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옥죄어 오는 온갖 두려움, 부끄러움, 자존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 큼을 믿고 용기 내는 일입니다.
20절에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우리의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이 드라마의 3막은 다시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는 거지 행색으로 돌아온 아들을 멀찍이서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단락이 참 좋습니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알아볼 수 없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단박에 알아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하면 좋겠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 슬프고 고통에 빠진 이들의 눈빛만 보고도 단박에 그의 아픔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흠집이나 약점을 들춰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려고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고백은 상관이 없습니다.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의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들
이 비유의 4막은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입니다. 그런데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큰 아들은 집안에서 들려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종들에게서 사실을 전해들은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이 매우 상징적입니다. 밖에서 떠돌던 둘째는 집으로 들어갔고, 집에서 효자 노릇하던 첫째는 밖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큰 아들에게 들어가자고 권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불평은 아버지의 행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아버지를 섬긴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으면서 창녀들과 노느라 재산을 낭비한 작은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불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느냐는 주장입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제 3자가 보았으면 큰 아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살진 송아지만이 아니라 모두 큰 아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만한다면 큰 아들은 섭섭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 둘째 아들의 형편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재산도 없고 아들 자격도 없습니다. 그는 잃었던 자식이었습니다. 그를 다시 얻었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뭔가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첫째 아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다
이제 이 비유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처음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못마땅, 그 자체입니다. 혐오스런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율법이 있을 터인데, 결국 그 율법이 자기 자신의 벽을 치고 타인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 성안에 갇힌 자신을 깨닫지 못하면 일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인을 저주하다가 끝나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여전한 모습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작게는 사사로운 갈등이지만 크게는 전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다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여러분도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죄가 있다, 없다. 죄가 크다, 작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아들의 전존재를 끌어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죄보다 은혜가 더 큽니다. 갈등보다 화해가 더 아름답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닮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