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를 이룹시다.
본문 : 요한복음 17장 20-23절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Ce n’est pas pour eux seulement que je prie, mais encore pour ceux qui croiront en moi par leur parole, afin que tous soient un, comme toi, Pere, tu es en moi, et comme je suis en toi, afin qu’eux aussi soient un en nous, pour que le monde croie que tu m’as envoye. Je leur ai donne la gloire que tu m’as donnee, afin qu’ils soient un comme nous sommes un, moi en eux, et toi en moi, -afin qu’ils soient parfaitement un, et que le monde connaisse que tu m’as envoye et que tu les as aimes comme tu m’as aime.
-인사합시다.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모두 반갑습니다. 오늘 귀한 봄날, 좋은 날씨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야외로 나와 이렇게 귀한 모임을 갖게 된 것이 참으로 기쁘고 반가운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생은 귀한 것입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귀하고 즐겁고 알차고 행복한 일이어야 하는데, 지난 2년이 넘도록 코로나-19로 인해 무엇인가를 억지로 지키고 버텨내는 것으로 살아온 것만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이 수동적인 일로만 느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서로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해서 사람살이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교회됨
세상의 모든 것, 눈에 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가치가 있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떤 누가 하찮게 보인다 해도 가치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잘 발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나됨, 나다움’을 잘 발휘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 역시 그 가치, 그러니까 “교회의 교회됨”을 잘 발휘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교회의 교회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질문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교회됨은 무엇일까요?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교회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교회의 교회됨은 서로 지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들판에 서있는 나무 한그루를 보십시오. 저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든든하게 나무 기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 기둥에 붙은 가지들은 저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저렇게 서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서로를 떠받드는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잘나고 멋진 부분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교회됨이라고 믿습니다.
-부족함을 받아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을까요? 이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먼저 나의 부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 홀로, 나 혼자, 내 멋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닌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치열한 경쟁의 세상입니다.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내가 부족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은 크나큰 자신의 약점이 되지만, 하지만 사랑의 관계 속에서의 부족함은 그들을 더욱 굳게 결합시켜주는 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부족함을 통해 옆에 계신 다른 분의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분리되고 고립되며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라는 문화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손은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깊은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되신 교회는 이런 관계적 실존을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람들이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의 사귐에는 하나가 더 첨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제자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굳은 결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진리 안에서의 삶입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니까,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아이를 안고 다니는 부모를 보게 되면 그런 띠가 있더군요. 아이랑 부모랑 같은 방향으로 보게 되어있는 띠입니다. 마치 부모 품에서 부모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처럼 하나님 안에 사는 삶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것입니다. 곧 거룩한 삶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신음하는 피조세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빼놓고는 거룩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의 하나됨” 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21절) 주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협상도 아닙니다. 주님은 오직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자기를 비웠습니다. 이것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초월입니다.
시냇물은 강물에 흘러들어감으로써 더 큰 몸을 얻습니다. 강물은 바다에 흘러들어감으로써 더 큰 몸을 얻습니다. 이것을 초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살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생명이 됩니다.
-영광에 참여하다
이런 일치를 온 몸으로 살아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광’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22a) ‘영광’은 문자 그대로 ‘빛나는 광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이란 세상 사람들 앞에 ‘짠~’ 하고 드러나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겨주신 일을 완성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광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영광은 수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입니까? 먼 데 볼 것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명을 북돋고, 돌보고 살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하지 말고, 오늘 무슨 좋은 일을 할까 소망을 품고 살면 됩니다. 소박하나마 그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깊은 일치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까닭을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일차적으로 증언의 매체는 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이루어내는 깊은 일치와 사랑의 분위기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의 깊은 일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기다려주고, 손 잡아주고, 일으켜주고, 함께 걸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 노인과 아이들…. 교회가 아니었더라면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한 데 불러주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와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들의 삶에 연루되어가면서 더욱 더 큰 존재로 성장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를 이루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깊은 이해와 일치와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일치의 정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불의를 타파하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고, 세상의 연약함을 감싸안는 사랑의 품이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향해 함께 전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