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8일 부활절 제4주 (2022년-19호)

제목 :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본문 : 사도행전 9:36-43, 요한계시록 7:9-17, 시편 23편, 요한복음 10:22-30

【요한계시록 7:9-17】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 하고 외쳤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요한복음 10:22-30】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 나눕시다. 따뜻하고 포근한 봄날의 날씨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봄날 같기를 바랍니다. 봄이 되면 얼어붙었던 세상이 풀어집니다. 사람에 대한 마음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주님 같이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야외로 나가서 봄을 만끽했습니다.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봄날 같이 좋은 날이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상, 한번 사는 세상을 아깝지 않게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품이 귀합니다. 교회가 그런 주님 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태도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오랜만에 요한계시록 본문을 놓고 생각해 보니, 처음 드는 생각은 본문이 무척 낯설게 여겨졌습니다. 저 역시도 제일 눈과 손이 가지 않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늘상 요한계시록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만을 주로 읽고 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어떤 이야기인지 첫 부분을 읽고, 결론 부분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책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부러 관심의 대상 밖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멀리 치워놓는 성경말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예 성경 읽기 자체에 관심이 없는 부류도 있겠지만 예외로 놓겠습니다.

첫째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호기심, 궁금증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가 나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기심이 좋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좋지 않은 호기심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은 잘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만을 아주 심각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에 바쁩니다. 구체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의미나 상징이 나타내는 바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예를 들면 숫자 666이 상징하는 바는 뭐다, 적그리스도는 누구다-냉전 시대에는 스탈린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히틀러다.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만-, 140000명이란 숫자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확대시켜 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찾으려는 바는 간단히 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열쇠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미래 사건들의 예정표, 날짜표가 숨겨져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독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마치 여기서 인류 전체의 비밀을 찾았다고 여기고 사람들에게 설파합니다.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각본을 찾습니다. 이런 태도는 이단적인 행동입니다. 최근까지도 많이 나타났던 이단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로는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가 싫고, 요한계시록 자체가 가진 상징적인 언어가 너무 많아서 알고 싶지 않고, 읽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태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번 읽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책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책이기도 합니다. 환상과 환상이 연결되고,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격이 떨어지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계시록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성경에 맨 마지막에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 안에는 여러 문학 장르의 책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 장르에 속합니다. 성경 안에 시라는 장르도 있고, 편지도 있구요. 서사가 있는 역사도 있고, 신화적인 장르도 있고, 잠언 같은 지혜문학 장르도 있듯이,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라는 장르의 글입니다.

묵시문학은 무엇인가 하면 한 마디로 해야 할 말,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전할 수 없는 환경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장르입니다. 꼭 해야 하겠는데 이것을 말하면 심각한 죽음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장르가 묵시문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박해나 종교적인 박해의 상황에서 에둘러서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 로마 황제 시절에 쓰여졌습니다. 때는 95년경, 1세기 말입니다. 이때 복음은 그리스와 로마의 유럽지역과 북아프리카, 팔레스틴과 소아시아 지역에 까지 은근히 전파되었습니다. 그중 소아시아에 살던 신앙인들에게 이제 본격적인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드문드문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가 있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예수를 믿는 이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포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겁에 질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탄생의 이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악이 득세하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 악의 화신은 세상 최고, 세상 최강의 힘을 지닌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이런 힘을 지닌 황제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찬양하라,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이에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황제의 이런 反 하나님, 反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시대가 험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자밥이 되어야 하는 이 현실에서도, 악의 화신인 로마의 황제가 아무리 강해보여도 무한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우리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오늘날의 악은 더욱 간교해져서 세밀하고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악의 특징은 달콤함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악의 모습은 무자비함입니다. 그리고 총체적입니다. 그래서 전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모든 일의 끝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들, 그리스도인들을 억누를 수 없다는 선언.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하고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은 누구인가? 지금 강대한 힘을 가지고, 나를 당장 죽일 수 있는 로마 황제인가? 아니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신가? 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전봉헌절(수전절)

오늘 복음서 말씀, 요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때는 이스라엘에 어떤 명절이 되었습니다. 어떤 명절인가요? ‘성전 봉헌절’ 명절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이날을 ‘수전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닦을 수, 전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깨끗이 한 날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한다는 말은 성전이 더러워졌던 일이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유대인들에게 3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이 명절들의 유래는 예상하시듯이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수전절, ‘성전 봉헌절’은 훨씬 후대에 생긴 명절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때 지어진 성전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이 쳐들어와서 모든 성전이 불타서 사라졌습니다. 수 십년이 지난 후에 스룹바벨에 의해서 다시 지어지긴 했습니다만 400년 정도 성전이 없는 시대를 살았기에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사라진 고통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165년 전, 주전 165년에 안티오쿠스 4세 왕이 시리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 있었습니다. 곧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얼마나 교만한지 스스로의 이름에다가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이 이름이 왜 교만한가 하면, ‘에피파네스’는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이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이 볼 때 유대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섬기지 않고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상한 신을 섬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치욕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신앙의 심장을 공격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다가 유대인들이 거부하는 돼지고기를 올려다 놓고, 성경을 소유한 자들을 죽이고, 안식일을 금했습니다.
마침내 성전을 다시 회복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올려놓았던 제단을 다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 제물의 공간이 되어버린 제단 돌을 버리고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봉헌절(수전절)입니다. 그런데 유대 성전 제단에는 불이 항상 붙어있어야 하는데, 곧 불이 꺼지면 안되는데, 불이 붙어 있나요? 없지요? 그런데 성전이 파괴될 때 한 제사장이 성전 불을 몰래 빼내어서 깊은 동굴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 일을 기억하고 제사장들은 그 불을 찾아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 백년 전 숨겨놓은 불이 그대로 있나요? 없지요. 불을 숨겨 놓았던 그 동굴에 가보니 불은 없지만 어떤 액체가 있는데, 그 액체를 담아다가 제단에다가 뿌렸습니다. 잠시 후에 해가 들어오자 제단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성전 봉헌절’입니다.

-논쟁이 벌어지다

예수께서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고 계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쌌습니다. 이 말 뜻은 관심과 애정의 표현으로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를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둘러싸다는 말은 ‘위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협하는 듯한 태도로 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지금 당신 때문에 혼란 속에 빠졌소.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미 말했다는 말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을 말합니다.
이 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임을 드러내는 것”, 이것을 사람의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합니다. 곧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의 화려함, 수려함이 아닙니다. 곧 내 말은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는 것은 많이 알아서도 아니고, 말을 잘해서도 아닌 것이지요.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을 만났더니 그동안 숨겨왔던 나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났더니 내 욕심대로만 살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났더니 돈 많이 벌고, 좋은 차, 좋은 집에 사는 일이 인생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증거들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보고서 만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이 이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이 주인을 알아보는 모습을 보십시오. 양의 모습이고 양의 태도입니다. 양은 자신의 목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따릅니다. 목자는 그들을 압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영생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인간의 불노장생의 표현이 아닙니다. 영생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닙니다. 영생은 충만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 다음 누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영원한 생명을 살면 영생을 누리는 것이고, 지금 영원한 생명을 살지 않으면 영생은 없습니다.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잇대어져 사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일수도 있고, 전혀 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영생의 반대말은 멸망입니다. 멸망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겠지요. 오늘 말씀 속에 예수님의 선언과도 같은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맺음말

오늘날도 우리는 정치적인 메시아, 마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메시아를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 자신의 재력을 드러내는 것이 칭송받는 세상이기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스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칭송의 대상을 찾느라 바쁩니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 일상의 영웅들… 좋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은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비참해 보이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할 정도 작고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숨겨져 있고, 배어져 있음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신앙을 성장시키는 일은 이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갖추는 일입니다. 모두가 세상의 메시아, 황제의 권력과 돈을 추앙할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어야 할까요? 오늘 이 시대 우리 신앙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찾는 한 주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