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제자들을 보내시다
본문 : 열왕기하 5:1-14, 갈라디아서 6:7-16, 시편 66:1-9, 누가복음 10:1-11, 16-20
【열왕기하 5:1-14】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 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시리아 왕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온 한 소녀가 한 말을 보고하였다. 시리아 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으니, 가 보도록 하시오. »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찢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였다. «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 이스라엘 왕이 낙담하여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
【누가복음 10:16-20】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인사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반가운 인사를 전하고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씨 속에서 우리가 7월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살이의 버거움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끔찍한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그런 일들로 우리가 세상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우리가 잘 외우고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혐오의 대상, 피할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 살면서 그 곳을 아름답게 가꾸는 몫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오늘 열왕기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몇 주 전 설교 시간에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인 엘리사 선지자의 이야기로 넘어와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활약은 이스라엘과 유대 지방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을 만큼 강렬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역시도 한정된 시간을 살았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엘리사 이야기로 넘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전하는 바 초점은 이것입니다. “각 시대마다 각각의 자리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셔서 부르신다. 부르셔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흉악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졌다’고 말하지만 오늘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내어던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굳이 선교사님들의 책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여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하나님이 이끄시는 바를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귀한 일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신다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문제가 발생하다
말씀의 때는 이스라엘 고대 사회입니다.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보면 적어도 2500년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종종 전투를 벌이던 ‘시리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시리아가 지도상에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기나긴 역사가 대단합니다. 이 나라의 군사력이 그 당시에도 대단했나 봅니다. 이스라엘은 늘 시리아의 군사력 앞에서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입장에서는 곤란하기도 하고 난처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옆 나라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유능한 장수입니다.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자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병,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생활환경이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병으로 불리는 악성 피부병에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장수이고, 왕으로부터는 아낌을 받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사람인데, 그의 인생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이 될까요? 왕이 나라에서 실력이 좋은 뛰어난 의사들과 함께 좋은 약들을 구해서 보내주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집의 시중드는 하녀가 뜬금없이 이 사건에 끼어듭니다. 이 하녀는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아이입니다. 아마도 여종으로 쓸려고 잡아온 10대 소녀겠지요. 이 소녀의 의견이라고 하는게 있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용감하게도 이 소녀는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이스라엘 예언자를 만나볼 것을 추천합니다. 귀가 솔깃해진 나아만이 시리아 왕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이 소녀가 한 말을 전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건은 점점 커집니다. 이 초라한 소녀가 말한, 어쩌면 그냥 지나쳐 버릴 법한 말이 나라들 사이의 외교적인 문제로 변했습니다. 그 시대는 언제든지 금방이라도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고, 상대방을 침략하기 위해 계략을 꾸밀 수도 있는 시대였습니다.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난처해졌습니다.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듬직했겠습니까?
이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찾아 가서 병을 고치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의 진행이 나아만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면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이 발생합니다. 힘이 강한 옆 나라의 군대 장군이 찾아왔는데, 엘리사라는 예언자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례하고 불쾌하게 느껴집니다. 사환을 시켜서 한다는 말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합니다. 불쾌했던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감정이 폭발합니다.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립니다. 하지만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엘리사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랬더니 예언자의 말 그대로 깨끗하게 병이 나았습니다. 피부가 어린아이 살결처럼 되었다고 오늘 이야기가 끝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열왕기하 5장의 이야기는 어쨌든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서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 나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예언자 엘리사가 나아만의 지독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로 읽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중병에 걸린 누군가가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벌어지는 온갖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해결책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해결책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해결책을 주시더라도 우리가 그 해결책을 알아듣는 능력을 갖고 있을까? 의 문제가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하찮은 소리 가운데
여러분, 낫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나아만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제게는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일러주신다. 하지만 “우리가 온갖 방법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들려옵니다.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건네주시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이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람을 통해서 전해주십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말씀 속 예언자 엘리사입니다.
오늘 예언자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미래를 점치는 사람입니까? 영험한 능력의 소유자라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미리 아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가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리를 곧이곧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있다, 신앙이 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 뜻도 그렇습니다. 예언자에서 조금 더 나가면 평범한 일상 속 사람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들을 능력을 지녔는가? 들을 능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이런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이는 나아만 장군에게는 이 작고 초라한 몸종 소녀가 뱉어 낸 말입니다. 하찮게 여겨지는 소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발견해볼까요?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본다면, 예전에 제가 어떤 영화를 하나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 제목이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불우했지만 천재입니다. 음악의 천재, 소리의 천재입니다. 제게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성장했습니다. 밤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우면 멀리서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바람에 쓸려 다니는 물건들 소리, 바람에 삐걱거리는 창문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이 소리가 이 주인공 소년에게는 그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의 리듬이자 운율이 되어 살아납니다. 이 소년에게 이 세상의 모든 소리는 불필요한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라 음율이 되고 이 모인 음들이 선율이 되어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소음이지만 누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음악이 된 셈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찮게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있지요. 쓸모없는 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내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거나 뭔가 하나님께 해결책을 구할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작고 사소한 누군가의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가는 격려와 위로로 내 마음에 용기를 갖게 되고 마음의 근심이 덜어지는 경험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눈에 확 띄는 것들만은 아닐 것입니다. 작고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소리, 손짓, 몸짓, 대화 이런 것 속에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알아챌 수 있는가’ 이겠지요.
-내 생각에는
알아채는 일은 지식이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내 안에 있습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뱉은 말 가운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11절 말미에서 찾았습니다. 11절에 나아만이 말합니다.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라는 말 속에 숨어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에게 내려진 엘리사의 어이없는 처방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면서 내뱉은 말입니다. 나아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나아만의 생각에는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자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엘리사가 가진 하나님과의 소통 능력을 동원하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상처 위에 직접 손을 얹어서 치료해야 합니다. 이게 나아만이 생각하는 도리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여러분,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자주 내뱉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 속에 숨어있는 의미는 이미 자신은 판단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만들고 말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가끔 그런 경우들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습니다. 어려움과 난처함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만이 아니라 과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답도 명확합니다. 이러이러하게 진행되어서 이렇게 결론이 나야한다고 확고부동한 생각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씁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렇게 처리합니다. 기도의 자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장면입니다. 하나님 말씀 듣기 이전에 내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해놓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 내 상식, 내 견해, 내가 설정해 놓은 답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이고, 하나님이 부입니다.
-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 속에는 내 기준, 내 견해로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기회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 앞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어드릴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잔뜩 갖고 온 것은 사례를 위해 가지고 온 은과 금과 옷들만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의 방법과 결론을 잔뜩 안고 왔습니다. 낫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을 비워놓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세다 연못’의 중풍병자 아시지요? 38년 동안이나 벳세다 연못에서 낫기 위해 머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낫고 싶으냐?”(요 5:8)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들은 38년 묵은 환자는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이나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가 낫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모르시는가? 당연한 소리를 왜 하실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질문을 내 영혼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낫고 싶은지, 아니면 낫고 싶은 척을 하는 것인지, 이렇게 굳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내 영혼의 열망을 모두 잊어버린 것인지, 이 질문 앞에 서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50이 조금 넘었으니 50년이 넘도록 쌓아 놓은 아집과 편견의 덩어리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나는 이 짐을 잔뜩 지고 매일 걷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으면, 좀 덜어놓으면 걷기가 훨씬 편할텐데, 훨씬 나은 생을 살 수 있을텐데, 짐을 버리기는커녕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만든 편견으로 더욱 단단해 집니다. 이게 우리 사람의 모습입니다.
-파송 받은 우리
오늘 누가복음서 10장의 한 단락에 보면 예수님께서 70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흥분된 마음으로 들떠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이 때 돌아온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파송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파송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험하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내라고 파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손발에 먼지도 묻고 몸에 때가 묻기도 하고, 마음에는 상처도 입습니다. 그러니 좌절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기뻐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사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정말 잘 살아야 됩니다.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살필 줄도 알아야 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으로 보내신 주님께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로 되돌려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