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본문 : 호세아 1:2-10, 골로새서 2:6-15, 시편 138편, 누가복음 11:1-13
【누가복음 11:5-1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인사
귀한 주님의 날을 맞아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반가운 인사 나누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병들어 가는 피조 세계
오늘 말씀은 날씨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더우셨죠? 유럽에 닥친 더위가 엄청났습니다. 우리도 모두 경험해 보지 못한 더위를 경험했습니다. 뉴스에서는 ‘살인더위’가 유럽을 덮쳤다고 표현했습니다. 영국은 기상관측사상 최고를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얼음산이 떨어져 내리는 장면 보셨을 겁니다. 온 인류가 나서서 기후대책을 하루빨리 마련하지 않으면 온 인류가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꼴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인간은 참으로 똑똑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무척이나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여름을 더 시원하게 보내기 위해 에어콘을 만들었지만 온갖 배출 가스가 온난화를 가속시켜서 결과적으로 이것이 우리를 더 덥게 살게 합니다. 겨울에는 더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온갖 화석 연료를 사용하여 난방을 하지만 이것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와 대기를 오염시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 기독교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의 기도는 어떤 것으로 채워져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라는 거대한 주제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망가져가고 있고, 병들어 가고 있음에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파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아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의 작은 기쁨
저는 지금 우리의 때가 “기도하기 참 좋은 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 그렇게 믿습니다. 참된 기도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뜻 앞에 서게 만듭니다. 참된 기도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다거나, 너무 거창한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 감사의 말 한마디 하나님께 드려보셨습니까? 당연히 그런 기쁨이 있으셨겠지요? 오늘 하루의 시작, 첫 생각, 첫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입니다. 또 소박한 끼니를 앞에 놓고 거창한 말로 기도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에 감사하는 그런 감사의 기쁨 가져보셨는지요? 기도란 그 자체로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기도가 이뤄지는가 아닌가’ 이전에 기도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기도 점검하기
그런데 기도가 그렇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평생 우리는 작은 기도, 큰 기도하면서 생활을 해왔는데, 우리는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기도가 난처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시는지요? 적어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간단하게나마 기도하고,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를 하실 겁니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필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해당되는지 점검해보십시오.
한 가지는 기도 없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 무슨 사고가 일어나는 게 확실하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기도를 이런 방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나누면서 “원숭이-바나나” 실험 이야기를 들려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은 ‘외재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면 건강해지지가 않습니다.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줘야 삶의 동기가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원숭이는 자신 안에서 힘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고가 날까 두려워, 외부적인 일이 생길까봐 기도를 하게 된다면 이런 생각은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이런 현상은 기도가 아니라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입니다. 이런 모습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은 거꾸로 방향을 잡습니다. “기도를 꼭 시간을 내서 해야 되나? 삶이 기도지” 라고 멋진 말로 기도를 비하하고 맙니다. 일종의 ‘기도 냉소주의’에 빠져 버립니다. 나의 기도가 나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를 자의식이 강한 성숙한 사람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을 현실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와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전철을 타려고 움직이다보면 혼자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게 되지요? 그런데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구나.’ 즉 대상이 있는 말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상이 확실하게 있으면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만 대상이 없는 말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대화하고 싶으신가요? 뭔가 통하는 사람이겠지요? 그 대상이 가족이든지, 친구이든지 서로 통하는 게 있어야 대화하고 싶어지고, 그 대화가 깊어집니다. 대화의 대상을 자기 삶에서 소중한 현실로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기도드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기도
여러분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기도 생활을 하시는지요? 막막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도 틈틈이 날이 밝기 전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무슨 기도를 드리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 기도 내용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 내용만은 나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물리쳐 달라고 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체포당하기 전에 드린 기도를 17장에 기록했습니다. 상당히 긴 기도입니다. 이런 몇몇 자료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평소에 드린 기도는 “당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제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여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주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친구의 간청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먹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게 없었습니다. 요즘같이 배부른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일겁니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은 아마 멀리서 하루 종일 걸어왔겠지요. 피곤하고 배도 고팠을 겁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심한 시각에 이웃집 친구를 찾아간 겁니다. 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친구는 이미 문을 걸어 잠갔고, 모든 식구가 잠이 들은 상태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찾아서 준다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8절)
이 결론은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옆집 친구가 부탁을 하니까 그 우정을 생각해서 귀찮지만 일어나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는 것이 독자들의 예상입니다. 이런 예상과 달리 우정 때문이 아니라 친구의 간청 때문에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간청’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청은 헬라어 ‘아나이데이아’의 번역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스러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도 기도의 말들 중에서 이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될 것입니다. 간청기도, 또는 강청기도라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제목으로 된 책도 있습니다. 그런 책은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그 책의 저자들은 몇몇 성경 본문과 몇몇 개인적인 간증을 곁들여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간구하라고 닦달합니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예수님의 비유가 눅 18:1-8절에도 나옵니다.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갔습니다. 처음에 재판장은 과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요청을 해결해주려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요즘처럼 기도 냉소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부모를 완전히 신뢰하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그리고 간청의 방식으로 간구하는 신앙적인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고 필요합니다.
-욕망의 배설?
우리의 기도의 문제는 이런 성경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전에 ‘세자매’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첫째 딸은 유난히 주눅이 든 삶을 살아가고, 막내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데 반해서 그중 둘째만이 일종의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학교수 남편에 자신은 대형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중 제 마음이 씁쓸하게 느껴진 부분은 그 교회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기도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광교신도시, 50평대 아파트…’ 그녀가 감사할 구체적인 내용들이 열거되는데, 저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경제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 안되나?” 하고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해야지요.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지요.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세상적 욕망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는 수준에 머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그 기도의 도달점, 도착점이 무엇인지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찾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아나이데이아’(간청)에 초점을 두면 이상해집니다. 염치없이 무조건 매달리는 것은 당연히 잘못입니다. 야밤에 옆집 친구 집을 찾아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걸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에서 핵심은 떡을 빌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 집주인입니다. 집주인은 무례한 친구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비유에서 초점은 무례하게 간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자식들도 철이 없을 때는 부모에게 떼를 쓰듯이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그래도 부모들은 지는 척하고 들어주지만, 철이 들면 부모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적으로 철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고 간청하고,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쉬운 말로 하면 신앙적인 철이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철이 들려면 내 요구, 내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나의 주님이신 분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그렇기에 듣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그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루는 사랑의 어울림 속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뜻을 받들 수 있을까요?
숫사자와 암소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인 사자는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아내를 위해 늘 신선한 살코기를 구해다가 대접해주었습니다. 아내인 암소는 싫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암소는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대접했습니다. 숫사자는 싫었지만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건초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둘은 함께 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둘은 여전히 사랑했지만 헤어지리로 했습니다. 헤어지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상대방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사랑했기에 일어난 파탄입니다. 대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말하는 사랑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지식’입니다. 서로를 잘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씀 맺기
오늘 우리가 모였습니다. 바베큐 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또 그 뜻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어! 여기에 하나님이 숨어 계셨네?” 라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우리들이 겪는 일들 속에서, 하늘과 땅과 바람 속에서, 산과 강과 계곡에서, 때로는 피어나는 꽃과 잡초들 속에서, 농부들의 땀방울 속에서, 누군가의 눈물 속에서, 고단한 이웃들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볼 마음이 있으면 보입니다. 하지만 분주한 이들은 주님의 곁을 그냥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바삐 내달리는 이들의 귀에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 건네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을 멈추고 기도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것이 바로 된 이후에는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라 »고 말했습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결론으로 11-13절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