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들포도 인생
본문 : 이사야 5:1-7, 히브리서 11:29-12:2, 시편 82편, 누가복음 12:49-56
【이사야 5:1-7】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누가복음 12:49-56】
«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다. «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에 함께하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서로에게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설교말씀을 시작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은 정말 자연스럽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한국에서는 비가 많이 와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연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반 지하 방에 사시던 분들 가운데 차오르는 물을 피하지 못하고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어쩌면 자연이 화가 나있는 듯합니다. 우리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자연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듯합니다. 뉴스에서 보니, ‘피해는 가난한 사람부터 당한다.’는 말이 마음이 많이 남습니다.
이곳 프랑스 땅에서는 여러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지역에서 가뭄으로 인한 산불로 비상사태입니다.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괜찮다.’고 여기기에는 우리의 오만함과 무지가 너무나 크고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잃은 분들과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대 틀과 장르 틀
지금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시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말씀 속에는 ‘시대’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 ‘시대가 담겨있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대 안에 담긴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거룩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지만 시대라는 인간의 상황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 인간의 마음, 인간의 세상이라는 토대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어떤 장르의 말씀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성경말씀을 잘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천7백 년 전 지중해 동편에 면해 있던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이사야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 이사야 5:1-7절에는 ‘포도원 노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글은 어떤 장르의 글일까요? 율법인가요? 설교문인가요?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서 이 구절은 한 편의 ‘시’처럼 읽어야 합니다. 시는 시로 읽어야 합니다. 시를 논설문이나 법조문으로 읽으면 그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는 짧은 한 단어 안에도 풍성한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포도원’이 드러내는 이스라엘 유다 땅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노래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모든 글에서 어떤 특정한 문구가 반복되는 것은 그 내용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의 심정이 매우 절절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합니다.
-시라는 무기
오늘 이사야서 5장의 말씀을 읽다보니, 문득 예전에 ‘윤동주 시인’을 다룬 ‘동주’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아시다시피 윤동주 시인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를 살았던 분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친구 가운데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강력하게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윤동주 시인은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무기로 저항을 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들보다도 나라 잃은 청년의 섬세한 아픔, 신앙적인 양심과 고뇌를 그의 시로 표현합니다. 때로는 ‘시’라는 나약해 보이는 무기가 손에 든 무기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 단락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사야는 ‘시’라는 문학 장르 속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들 예루살렘 백성의 비참한 운명과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 예레미야 애가에 이런 예레미야의 탄식이 나옵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예레미야애가 1:12a)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나몰라라하고 모두가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섭니다. 하나님을 버린 곳에 남는 것은 ‘폭력과 불의’입니다. 평화가 아닌 폭력과 정의가 아닌 불의가 판을 칩니다. 이런 때 가장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무심한 듯 예루살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 역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1-6절의 말씀 이해
우리는 세상에서 질 좋은 포도와 포도주를 생산하는 프랑스 땅에 삽니다. 그래서 가끔 뉴스에서는 올해 날씨가 어떠어떠해서 “포도주의 질적인 상태가 나을 것이다, 혹은 나쁠 것이다”라고 말하는 뉴스를 듣곤 합니다. 포도라는 과일이 갖는 특별함이 프랑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 지중해 주변 나라들에게 큽니다. 이사야의 배경이 되는 이 땅의 사람들도 포도 농사가 그들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1-2절의 짧은 구절 속에 이 노랫말에 당시 포도농사에 대한 전반적인 사연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일궜습니다. 기름진 산은 포도 재배에 안성맞춤입니다. 여기서 산은 심하게 가파르지 않은 언덕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포도 재배에서 중요한 것은 배수와 햇볕입니다. 언덕은 배수가 좋습니다. 특히 언덕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최상품 포도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서 주인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지금이야 트랙터나 포클레인으로 쉽게 밭을 일굴 수 있지만 당시는 모든 걸 사람의 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도 세우고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술틀까지 팠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입니다. 좋은 포도가 맺혀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아무 쓸모가 없는 들포도만 맺혔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들포도만 맺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는 게 최선입니다. 처음부터 종자가 잘못됐다면 다시 갈아엎고 새 종자를 심어야겠지요. 거름이 부족했다면 거름을 보충해줘야 합니다. 심한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참고 기다려야겠지요. 본문의 포도원 문제는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완벽한 조건인데도 들포도만 맺은 겁니다. 주인은 이렇게 결정합니다. 5,6절입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포도원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좋은 포도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분노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농부는 절망했습니다. 포도원을 향했던 사랑의 크기만큼 분노와 절망의 크기도 큽니다. 영혼을 기울여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앞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나님도 절망하십니다. 안타까워하시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십니다.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지요.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이 절망감을 ‘우리가 아는가’입니다.
-7절의 말씀 이해
다들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포도 농사 잘 짓는 법에 대한 설명이 아니겠지요? 이사야는 이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전한 겁니다. 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는 원래 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최상품의 포도 묘목을 심는 농부의 심정으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언덕에 심은 포도나무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좋은 포도를 결실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절망했고 분노하셨습니다. 배신당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끝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화가 난 농부가 포도원을 불사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절망과 분노의 원인을 이사야는 본문 7b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신 것, 바라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 기대하신 것은 ‘공의’라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셨는데, 그들은 거꾸로 포학과 부르짖음이라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정의나 공의는 오늘날 말로 ‘사회 정의’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모습
이사야는 당시 상황을 8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지난 주일에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이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8절) 기억하십니까?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의 편중”입니다. 집과 땅의 독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다른 하나는 “향락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12절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거문고와 소구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일도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하고 명료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고급스럽게 살지만 하나님의 일과 능력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왕과 귀족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사야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귀 기울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전하는 선지자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지자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희생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귀족의 마음에 드는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거짓 하나님 선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통장의 돈을 두 배, 10배 늘려주겠다고 선전하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잘 보십시오. 이사야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사회정의를 외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나가는데 모른 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당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당신들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면 어떤 말씀을 전했을까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을까요? 사회과학적 분석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배운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우리가 보았으면 합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두 가지 문제를 제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부의 양극화 현상입니다. 부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가난한 자는 너무 가진 게 없습니다. 그것이 교정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자가 많은 것을 독점하는 경제적인 문제제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돈과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지적입니다. 성경은 지적합니다. 재물을 섬기며 살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들포도를 맺는 인생일 뿐입니다.
제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부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평생 열심히 일해서 자기 일터 하나 가꾸고,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를 소유한 사람에게 양극화에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경계를 나누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돈이 전부인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바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사야 시대에 모두가 “더 차지할 것이 없을 때까지” 차지하려고 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도 없는 사람과 시대를 분명히 보고, 그 일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조차도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서 부당한 이윤을 쫓고, 교회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 바라시는 마음에는 관심도 없다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럽습니까? 어떤 특정한 교회가 그렇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이 아파하실 점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가장 가깝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모르고 나몰라라 하는 일 말입니다.
-들포도 인생
우리는 잘 살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으면 하구요. 불편하고 힘든 일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사는 고통과 아픔을 왜 우리는 모를까요?
한국 땅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피해가 컸습니다.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라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랑하기 보다는 아파할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에 한탄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좋은 신앙은 참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악한 세상을 멀리 하고 혼자만이라도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무리입니다. 세상이 병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역시 병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세상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망이 이사야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깊이 받아들이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에게 절실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