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본문 : 예레미야 2:4-13, 히브리서 13:1-8, 15-16, 시편 112편, 누가복음 14:1, 7-14
【예레미야 2:4-13】
야곱의 백성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가족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 나 주가 말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쫓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고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 그 황량하고 구덩이가 많은 땅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그 메마른 땅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살지 않는 그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는구나.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서, 그 땅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히고, 내 재산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나 주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알지 못하며, 통치자들은 나에게 맞서서 범죄하며,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다녔다. »
«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시 법대로 처리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 자손의 자손들을 법대로 처리하겠다. 너희는 한 번 키프로스 섬들로 건너가서 보고,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서, 일찍이 그런 일이 일어났던가를 잘 살피고 알아 보아라. 비록 신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신을 섬겨도, 한 번 섬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하늘아, 이것을 보고, 너도 놀라고 떨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려라. 나 주의 말이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
【누가복음 14:1, 7-14】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거룩한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 삶을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성도들 간에 환영과 반가움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의 말씀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시간 갖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한 단락을 읽었습니다. 구약성경을 구분해서 보면, ‘예언서’라는 큰 단락, 말씀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大 예언자라고 알려진 세 명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 예언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오늘 우리가 마주 대하는 본문의 예레미야 시대는 기원전 627년, 지금으로부터 2600년도 더 먼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 유다 나라의 요시아 왕이 다스리던 시기부터입니다. 예레미야의 활동은 앗수르와 이집트의 속국시대에서 바빌론의 침략을 견뎌내던 시기와 바빌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했던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앗수르와 이집트, 바빌론 이 세 강대국이 서로 유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시대가 바로 예레미야가 살던 그의 시대, 그가 살던 땅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걱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세가 불안한 시대입니다. 이 때,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이 모습을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예레미야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만 하나님이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 앞 시대에도 하나님은 다른 예언자를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야입니다. 그의 시대를 우리 시대의 달력으로 표현하면 기원전 740년 경 부터입니다. 예레미야 보다 100년 정도 앞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100여년의 시간차가 있다하더라도 이 두 예언자의 글을 읽어보면 좀 헷갈립니다. 그리고 겹쳐집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든 말씀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시대에 읽어도, 예레미야의 말씀을 이사야 시대에 읽어도 알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말씀을 오늘날을 배경으로 쓰여진 말씀으로, 당장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어 본다면 어떨까요?
말씀 한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6절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를 않는구나.” 잘 들으셨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가 하면, 우리가 구덩이에 빠질 위험에 처해있고, 죽음이 가득한 메마른 땅을 걷고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살 수 없는 황량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이런 처지에 놓여있는데도 사람들이 주님을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매칭이 안됩니까? 2600년 전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혀 어색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당연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완고한다는 말입니다. 2600년 전 사람이나 오늘 우리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한탄스런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용감히 ‘예’하고 대답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다.
요즘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은근히 사람들이 ‘점’을 보러 많이 가는가 봅니다. 저는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프랑스 땅에도 은근히 점치는 사람을 광고하는 쪽지를 길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여기도 똑같이 불안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들어보면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점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점 보러 가는 그 속마음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엿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미래란 불안한 것입니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이 여러 가지로 예측이 가능한 세상이라면 덜하겠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뭔가 확실한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걸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말합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특별한 능력으로 엿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말씀, 즉 예레미야의 예언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미래를 족집게로 짚어내듯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내용,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
오늘 우리가 예레미야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예언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애절함’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부릅니다. 길가는 사람, 노는 사람, 일하는 사람, 하릴없이 방황하는 사람 남녀노소 모두가 예레미야의 호명의 대상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어라.” 여러분 오늘 우리 역시 부르심을 받아서 이곳에 이른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기에 이렇게 나와 앉았습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아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전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서 전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내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잘 들으셨는지요?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길래 나의 백성인 너희가 이렇게 행동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이 엿보이시는지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야단치거나 구박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려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하나 이것입니다. “내 말을 들어다오.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다오.” 이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의사가 하는 병을 진단하는 일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의 병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약을 처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난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직면하면 할수록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들 자신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하나님은 우리가 허무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고 진단하십니다. 허무한 존재가 뭐지요? 한 마디로 의미를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진단하시는가 하면, 사람들이 헛된 우상을 쫓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꿰뚫어 보시는 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벌이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상을 쫓아다닌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니 그의 영혼이 허합니다. 뭔가 허무하고, 갈 길을 모르겠고,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괴로워합니다. 그러니 당장 자신을 위로할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이런 우상들이 즐비합니다. 정작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의미를 잃어버린 허무한 존재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 중 세 번째는 ‘주님 찾기를 잊은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진단에 따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놓인 상태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태가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구덩이가 즐비한 땅입니다. 요즘 시대에 구덩이를 파놓아 사람들이 빠지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짐승들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파놓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이 아니라 사람들이 빠지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크게 다칩니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발견되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계단하나만 잘못 헛딛어도 발목을 다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나님이 진단한 백성의 모습은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구덩이가 많은 땅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황량한 땅에 놓여있는데, 이 백성이 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지를 않습니다. 주님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인간을 뭐라고 말하면 좋겠습니까? 허무에 빠져 살 기운, 살아갈 희망을 잃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교만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결론의 말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고 결론내립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두 가지 악, 그것은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로 그들의 샘을 삼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높은 자리 낮은 자리
이 결론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오늘 복음서 말씀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 함께 모인 바리새인들은 서로 식탁의 상석 윗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윗자리는 주인과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 자리에 앉으면 자신의 위치가 높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충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않도록 하라. 주제 파악도 못하고 거기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일종의 지혜로운 처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유대교 문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고, 아마 동양의 스승들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흔한 처세술을 세상에서 듣고 배웁니다. 세상은 상석으로 올라가라고 우리를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못하면 어딘가 인생에서 실패한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석을 차지하려고 투쟁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일에 운명을 겁니다. 자기 상품화와 유사합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를 세상에 상품으로 내놓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얻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은 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런 수준으로 읽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겁니다.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 사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인간의 삶과 운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슨 뜻인지를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잘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죽음 앞에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로 만족하는 인생일 수 있는지 문제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가 무조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반드시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 말씀과 달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높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낮아질 가능성이 높겠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말하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라는 구조가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논리가 신앙의 이치를 다 갖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신앙도 세상적인 시선으로 진단하고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맺는 말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처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새는 웅덩이로 자신의 인생의 샘을 삼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샘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계신다고 자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샘이 말라버린 샘, 물이 새는 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모두 빼앗긴 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간절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