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1일 성령강림 후 제14주 (2022년-37호)

제목 : 죄인들과 더불어

본문 : 출애굽기 32:7-14, 디모데전서 1:12-17, 시편 14편, 누가복음 15:1-10

【누가복음 15:1-10】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
«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님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기쁨으로 환영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시겠습니다. 오늘 민족의 명절인 추석 또한 우리가 맞이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고향을 멀리 떠난 나그네 같은 존재이지만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보내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2장 말씀에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떠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12:1절에서 3절까지 단 3절, 5문장에 불과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곧장 떠난 것으로 우리가 이해해버리고 말지만 그 안에 얼마나 큰 아브람의 고뇌가 담겨있는지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의 행간에 담긴 어마어마한 크기의 삶의 고뇌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인생도 비슷합니다. 우리 역시도 떠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떠나올 때 얼마나 큰 고뇌와 고민,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브람이나 우리나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겪은 것도 똑같고, 하나 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품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것과 같은 위로와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비유 이해를 위해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1-10절의 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복음서 말씀에는 크게 보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2개의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입니다. 100마리 양을 치는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고서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양을 찾았습니다. 그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화폐의 동전단위) 드라크마 10개를 가진 여인이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져 결국은 찾아내었고, 잃었던 것을 찾은 기쁨에 대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비유의 이유 : 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조금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왜 이 비유를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 두 개의 비유에는 어떤 일이 전제되어 있을까? 이것 역시 살펴보아야 오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비유 앞에 전제가 되는 말씀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3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래서”라고 접속사가 앞뒤 문장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앞 문장은 뒷 문장의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밥을 많이 먹었다. 그래서 배가 부르다.”라고 말한다면 배가 부른 이유가 밥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이유가 앞에 있는 이유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앞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저 비유가 있으니 비유만 보지 마시고,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도 보시라는 말입니다.

1-2절이 그 이유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이것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라는 것이지요?

-죄인들과 세리들 VS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세리들과 죄인들 :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변으로 점점 모여듭니다. 이 모습을 어떤 불어 번역본에는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이 장면이 어떤지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죄인들과 세리들>을 사로잡은 것은 어떤 걸까요?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깨닫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전에는 멀게만 느껴지고 알 수조차 없었던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하나님 나라가 몸소 느껴지고, 만져지고,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떤 상황일까요?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이 깨닫게 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일까?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죄인으로 손가락질 당하던 내가 “가치 있는 나”로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풀어주는 말씀대로 이해하면 나는 그저 죄인 한 사람 뿐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해진 말에 비춰지는 나를 보면, 나는 그저 한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죄인1, 2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특별한 나로 삼아주심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 반면에 대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왜 이런 태도를 취할까요? 당연합니다. 뭔가를 예수 때문에 손해를 보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예수가 받는 존경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권위를 맘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설명하는 말씀이 곧 진리였습니다. 이것을 ‘진리의 독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일반 백성들이 걷어내는 종교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몫입니다.

누가복음서 만이 아니라 마태, 마가복음은 누가복음과 함께 공통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점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복음서가 전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 이 여정에 맞추어 사람들의 기대감, 혹은 긴장감은 더욱 커져 갑니다. 죄인들은 점점 더 예수님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특권의식, 진리를 독점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런 감정을 품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사람들은 그 말씀에 뭔가 다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점점 더 불편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 불편함은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예수에 대한 불만, 분노로 바뀝니다. 이 분노는 결국 예수를 죽일 결심으로 변합니다. 뭔가 점진적이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갈등은 점점 더 커져가는 구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갈등이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말로 갈등의 상황을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예수라는 이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음식도 함께 나누니 예수 그도 죄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예수님의 모습은 속칭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들, 하나님 앞에 온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다가서는 일에 거리낌이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별명인 셈입니다.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 11:19) 이 모습을 보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뭔가 다릅니다. 뭔가 고결하고, 더러운 것과 접촉 자체가 없으신 분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들의 착각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어떻게든 죄인들을 찾아내어 “너희는 죄인이야! 회개해!”라고 그들의 면전에 윽박지르고 있을 때, 주님은 묵묵히 그들과 먹고 그들과 마셨다는 것이지요. 아니, 묵묵히라기 보다는 기분 좋게, 즐겁게 먹고 마셨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입니다. 왜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친구 사이라면 마땅히 그러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을 죄인이라 정죄하시고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더불어 늘 함께 하시지만 죄에 물들지 않으십니다.

-잃은 양 비유

예수님은 오늘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째 비유에 제목을 붙이자면, “잃은 양 비유”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양 100마리를 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목동이라는 단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목동은 생명을 기르는 사람입니다. 동물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동물은 주인의 눈빛, 주인의 음성만으로 주인의 마음 상태까지 다 압니다.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양을 치는 목동입니다. 소설 속 장면 가운데 인상적인 장면은 목동이 양 하나 하나와 개별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양은 게으르고, 어떤 양은 애교가 많고… 이런 것을 주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양도 다 똑같은 양이 아닌 것이지요.
양은 굉장히 사회성을 띤 동물입니다. 무리를 지어서 지내지만 무리에서 이탈하게 된 그 양은 무척이나 갈팡질팡하게 되는 습성을 지닌 동물입니다. 그런데 일이 발생했습니다. 목자의 시선에서 멀어진 사이에 한 마리 양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풀을 뜯다가 완전히 외톨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오면, 이 순간을 요즘 사람들은 ‘멘붕’이라고 표현하던데, 길 잃은 양이 이 상태가 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을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화 그림 가운데 목자이신 예수님이 어린 양을 목에다 매고 있는 그림 보셨는지요? 양을 목에다가 맨 이유가 양이 완전히 넋을 잃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가 사라진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들에다가 99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목자가 99마리를 무방비로 내팽겨쳤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99마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99 vs 1

아흔 아홉 마리 대 한 마리. 1과 99라는 숫자를 써놓고 보니 갑자기 고등학생 시절이 떠오릅니다. 학생 시절 최고로 나를 괴롭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학이라는 학과목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늘 고민거리이자 해결 안 되는 숙제로 남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예수님도 수학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숫자가 가리키는 숫자의 크기를 예수님은 잘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1보다 99가 더 크지요. 그렇기에 절대로 99마리를 들판에다가 남겨두면 안됩니다. 99마리를 들판에다가 그냥 놔두면 곧 이어 더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다른 목자들이 도둑질을 해갈수도 있고, 들판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들짐승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 보듯 뻔한 장면입니다. 영리한 양치기 목동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거나 빨리 계산기를 두드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어리석은 수학을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는 1대 99의 계산법에 선뜻 동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무엇이 내게 해로운지를 직관적으로 잘 압니다.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주인이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았으면 할 것입니다. 주인이 나를 찾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겁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님 곁에 있는 이들, 예수님께로 몰려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보호받고,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인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보게 된 한국 뉴스 가운데 소위 ‘고아원’에서 자란 청소년이 나이가 차서 보호시설을 떠나게 되었지만, 몇 백만원 정도 지원금을 받고 세상으로 나오게 된 아이들이 사회적인 차별과 사회적 보호막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으로 내동댕이 쳐진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뉴스를 몇 차례나 들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고 아! 세상이 참 이렇구나. 냉혹하구나 느끼고서는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전히 99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말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1보다 99가 크다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하지만 밖으로 내쳐진 ‘하나’를 소홀히 하는 세상은 언제든 ‘아흔아홉’도 버릴 수 있는 사회라고 말입니다. 하나가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은 1대 98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1대 97이 되겠지요. ‘나는 99에 속해있으니 안전하다, 다행이다’라고 여기는 세상의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시선으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참 인간적이십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셨어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은 메말랐지만 신앙이 좋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의 인격적인 문제를 포함합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는 시선과 정성이 한 공동체를, 그리고 한 사회를 아름다운 공동체로 바꿉니다.

오늘 두 비유의 주제는 같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한다”는 것,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회개하라고 강요하거나 윽박지르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잃어버린 것은 ‘한 마리 양과 한 닢의 드라크마’지만 찾은 이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99마리를 놔두고 1마리를 찾으러 떠나느냐? 하고 의문을 품는 세상을 삽니다. 이것이 당연한 세상살이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기쁨임을 모르는 세상에 대해 다시 너의 삶을 잘 보라고 말씀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십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못 박히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이곳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이 일이 기쁨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