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생명을 얻으라.
본문 : 예레미야 32:1-3a, 6-15, 디모데전서 6:6-19, 시편 146편, 누가복음 16:19-31
【디모데전서 6:2b-19】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비는 인사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한 주간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사셨습니까? 이 시간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각자에게 맞도록 내려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이후
요즘 지하철을 타보면 저를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쓴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끔 노인 분들 정도만 마스크를 쓰고 계시고, 젊은 사람들은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코로나가 끝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엄청나게 긴 암흑과도 같은 터널을 빠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지요? 경제적으로는 코로나로 인해서 잘사는 부유한 국가와 빈곤국 간에 차이가 더욱 크고 분명해졌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초기 봉쇄 정책이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피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야생동물들이 돌아왔습니다. 무척 생소한 장면이지만 반갑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또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중국이 공장을 돌리지 않자 금새 대기의 질이 좋아졌다는 보도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 새로운 환경을 맞다
저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의 변화의 차이의 폭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이 아마도 교회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교회의 예배는 대면적인 활동이 중심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볼 때는 큰 타격이 바로 코로나였습니다. 이렇게 큰 충격이 교회에 불어 닥쳤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을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더 이상 예배 참석을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많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교회에 출석하던 신자들이 많이 줄고 교회에 내던 헌금도 많이 줄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학교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일학교를 통해 성장하던 아이들이 말씀을 접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기사를 보고서 교회에 불어 닥친 코로나 이후 상황이 뭔가 큰 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변화와 낯선 환경에 놓인 교회’라는 현실이 우리 앞에도 놓여있습니다.
오늘 디모데 전서의 말씀을 보다 보니 “우리가 맞게 된 이런 변화와 충격의 현실이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변화의 현장 그 시대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변화의 현실 앞에 마주 대하게 됩니다. 교회가 실제로 이런 변화의 현장에 있다는 말의 실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나가서 조금 큰 소리로 “집사님!”하고 부르면 몇 명은 반드시 쳐다본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는지요? 정말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도 하고, 또 많은 분들이 교회의 직분인 집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교회의 직분인 집사, 또 장로, 감독, 이런 호칭들은 단순히 교회의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한편으로 보면 집사, 장로 등의 호칭은 교회가 변화의 시대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적응했던 결과이기도 합니다.
-급변하는 교회 현장, 디모데전서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집사, 장로, 감독’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성경말씀은 디모데전서가 유일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인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집사, 장로 같은 직분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없었겠지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집사나 장로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디서 교회 직분에 대한 호칭이 시작되었을까요?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집사나 장로, 감독 같은 직분은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교회 신자들이 3세대 즈음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교회는 틀이 필요하고, 제도와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교회는 모여야 할 장소가 필요했고, 봉사가 필요한 곳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자라나는 새 세대를 양육해야 했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으로 양육하고 말씀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당연히 사도들의 지도력이 발휘되었습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는 말잘하는 사람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던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 시 사도신경처럼 고백하는 니케아 신조에 보면 교회를 고백하는 부분에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화려하게 꾸민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던 사도들에게 그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하나 둘 사라집니다. 사도들이 죽고,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가버립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이 말은 교회가 변화된 환경이라는 새로운 시대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죽었으니 교회가 시들시들해졌을까요? 쇠락해서 교회가 문을 닫았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신앙심은 더욱 견고해지고, 교회는 그야말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외부의 조건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들어오는 박해는 더욱 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교회는 번져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참된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백하는 집단입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150년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단들이 등장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한국 교회에 등장했던 자칭 재림 예수만 해도 수 백 명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하나님의 대행자를 자처하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이 참 많이 등장하고 활동합니다. 그 교세가 성장하고 있다고 염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경계하고 살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자칭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나 재림 예수와 같은 교주들이 사망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세가 사그러듭니다. 왜 그럴까요? 교주가 남겨놓은 재산 다툼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교세를 넓혀 왔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돈이 목적이었던 셈입니다. 그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임을 교회 역사는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의 3세대
사도들이 죽고 나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덕망 있고 지혜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신앙을 계승한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러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3세대, 4세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환경에 놓였습니다. 교회는 제도도 필요하고, 틀도 갖추어 나가야만 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놓인 배경, 이런 조건들 앞에 놓였습니다.
-디모데 전서의 배경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디모데전서 편지는 분명한 수신자가 있습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이 말씀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바로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1:2)라고 부를 정도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 디모데가 맡고 있는 에베소 교회와 주변 지역에 보낸 편지입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디모데라는 지도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디모데를 통하여 당시 교회 구성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섬기던 교회는 어땠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디모데가 목회자로 있던 교회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초기 교회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왔는데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신앙의 변질, 신앙의 왜곡의 가능성을 늘 안고 있었습니다.
-본문 이해
오늘 우리가 두 분이서 봉독한 말씀으로 각각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 :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 분명하게 이 편지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교회가 온갖 이단 교설들과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고 위태로울 때 바울의 이름으로 디모데에게 전해진 이 편지는 이런 것들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라고 권면합니다.
3절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이 말씀은 이미 교회와 교회 주변에 주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망치는 사람들은 교회와 거리가 먼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랑 아주 가깝게 있으면서 교회가 가르치는 바에 대해 한 마디씩 견해를 덧붙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라는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세상처럼 세상의 이치처럼 굴러가는 돈 사업장 같은 데가 아니냐고 거리낌 없이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변질이 돼서 교회 안에 하나님 보다 돈이 더 큰 힘을 발휘하거나 그런 낌새가 드러나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먼저 그런 견해에 대해 경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몸이신 교회가 세상 이치로 “그렇고 그런 곳”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은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5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하고 신실한 마음도 이득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교회가 변질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생명을 키우는 우유가 변질되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썩은 악취를 풍기는 셈입니다. 거룩한 교회가 썩어서 변질되면 그 악취로 온 세상을 진동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경건의 장으로 지켜주십시오.
-두 번째 단락 : 11절부터는 두 번째 단락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멋스럽게 시작합니다. 교회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가슴 찡하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여러분을 향해 부르는 호칭이 “김집사, 박집사, 이아무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더 따뜻하고 하나님 앞에 각성된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 디모데가 양육하던 교인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세상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예수님의 길을 내 길로 삼으려고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믿고 소망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명심하고 따라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피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악한 것’을 피해야 합니다. 악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피부만 민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악한 것들은 그저 막연하게 도덕적, 윤리적 죄나 무슨 악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도직입 하여 말하자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입니다.
«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9-10)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맨 처음 피해야 할 것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이 말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회중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대박나세요’라는 말이 덕담처럼 통용되는 시대에 부자 될 생각을 버리라니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가르침을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철없는 이야기로 돌려버려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자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 깃들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타인에게 배타적인 것입니다. 내 배가 부르기까지는 다른 이의 배고픈 사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누가복음 16:19 이하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부자가 악하고, 못되고, 매정해서가 아닙니다. 무감해서였습니다. 당혹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 역시 어쩌면 타자의 필요에 응답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명령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삶을 엄중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13절) 부탁이나 권고가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14)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는 이중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는데도 자기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목표를 아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그런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말씀을 꼭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말씀 맺기
말씀을 읽다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모험과 비슷합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덜 가는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타인과 이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의 싸움입니다. 내 안에는 헛된 망상으로 자라서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욕심,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돈과 권세를 가진 이들끼리 아귀다툼 하는 현실에서 타인을 향한 배려와 연민의 마음이 들도록 내가 먼저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싸움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돈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의 지배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높이십시오. 세속 사회에서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 자체를 아는데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십시오. 시인이 시에 영혼을 기울이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혼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빛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교회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기에 우리는 순간순간 더 나은 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 돈의 논리가 교회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주님의 길을 기쁘게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