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일 성령강림 후 제17주 (2022년-40호)

제목 : 믿음과 종과 부르심

본문 : 예레미야애가 1:1-6, 디모데후서 1:1-14, 시편 37:1-9, 누가복음 17:5-10

【누가복음 17:5-10】

사도들이 주님께 말하였다.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 «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 시간이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찬양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하는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겸손되이 듣고 깨닫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를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소리

가을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아침 저녁으로는 이미 차갑고 서늘한 날씨로 변했습니다. 전형적인 유럽의 가을 날씨입니다. 어려서 유럽의 작가들이 지은 책들을 보면 유난히 음습하고 축축한 날씨와 함께 길고 긴 겨울밤에 대한 표현이 많이 있었는데, 청명한 가을날만 보던 제가 이 날씨가 어떤 건지 이제는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환절기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난 한 주간 누군가가 낸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가를 가지고 한국 사회가 들썩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소리들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또 그 소리에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갑자기 뒤에서 차량 경적 소리가 들리면 몸을 급하게 피하게 되기도 하고, 누군가 크게 고함을 지르면 마음과 몸과 함께 마음도 움츠려 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군가의 기쁨으로 가득 찬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같이 웃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사람이 내는 소리에 내가 반응하고 있다는 표시이지요.

이 세상만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역시도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그냥 입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내 영혼의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일을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면 그 사람은 기분이 괜찮은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문을 세게 꽝 닫고 아이가 방으로 들어간다면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을 소리로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과 사람을 향해 내는 반응의 소리는 비단 목소리만이 아니라 내 마음을 표현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소리는 이처럼 어떤 한 존재가 처해있는 정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은연중에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도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편 37편의 충고

방금 전 함께 찬양한 시편의 시인이 말한 내용을 기억하시는지요? 1절의 말씀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왜 충격인가 하면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절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겨둔 진실, 부끄러워서 꺼내기는 힘들지만 무심결에 우리의 입으로 튀어나오는 속상해하는 심정, 시샘하는 말들을 우리가 내뱉으면서 산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어쩌면 사람은 평생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비교의 역사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 보아도 인간의 전형적인 특성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서 세상이 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뭔가 억울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에 더하여 생각이 하나님께로 번져 나갑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불의한 사람이 잘 사는 듯한 모습 때문이지요. 악한 사람은 평탄한 길을 걷는데,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3-5절)

여러분, 솔직히 불평과 불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불평과 불만이 우리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인생으로 끝까지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좋지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까지 모두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편은 우리가 불평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믿음이라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들의 요청

오늘 함께 봉독한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제자들의 이 요청은 제게는 좋아 보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아마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아니면 사람간의 관계 때문에 기도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 기억이 있는 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믿음의 세계가 궁금해서 이 세계로 들어가려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보다 더 중요하고 급박한 것이 많은 삶을 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믿음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6절)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으면 ‘더해주마’라고 하든지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든지, 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겨자씨와 뽕나무

예수님의 겨자씨는 씨 중에서도 아주 작은 씨입니다. 이에 반해 뽕나무는 겨자씨에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큽니다. 어른이 올라가도 될 만한 크기의 나무입니다. 믿음으로 뽕나무를 바다에 옮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단호히 말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런 환상을 심어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에는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 따로 없다는 뜻일까요? 그러니 믿음을 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일반적으로 부모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엄마 품속의 아이를 보십시오. 이런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의 관계, 믿음의 관계가 그 사람의 일평생을 좌우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고, 자신의 부모가 완전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부모님도 한 인간으로 미성숙하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부모와의 관계가 새로운 믿음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분명한 것은 어린아이 시절의 무조건인 신뢰와는 다른 관계가 부모와의 신뢰와 믿음의 관계로 형성되는 것이지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믿음의 차이가 있다는 점, 우리 믿음이 자라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믿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겨자씨와 뽕나무 이야기를 하신 걸까요?

-믿음의 차이

그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크기를 어떤 가시적 능력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초능력 비슷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들의 능력이 가득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백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 형식으로 하나님께 바칠 생각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이 가장 출중했던 인물입니다. 이들처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자들도 남에게 보일만한 능력을 갖고 싶었겠지요. 그들은 믿음이 클수록 더 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믿음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언젠가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어떤 목사가 며칠 째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금식기도도 함께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얻었다는 응답입니다. 그래서 바닷가로 교인들을 몰고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니 ‘물 위를 걷겠다’고 말입니다. 결과는 뻔한 일이지요.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지니는 것을 믿음의 일로 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은 믿음을 사람에게 나타나는 큰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뽕나무를 바다로 옮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런 일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능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뽕나무를 옮기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인가 하면, 그런 능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큰 능력을 나타내려고 믿음을 더해달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한 노력도 아무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큰일을 희망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익한 종

예수님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일반적인 제도였습니다. 그걸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 이야기입니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대접을 받는 게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주인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종은 먹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다 따랐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일을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무리 종이라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2천 년 전입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받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10절)

이 가르침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를 향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자기들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범적으로 살았습니다. 기도, 헌금, 구제, 금식 등, 모든 신앙생활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이런 인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인정욕구’라고 표현합니다만 인정욕구는 사람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살기도 하고, 인정 욕구에 매 말라서 죽기도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나 이만큼 했으니 알아주시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한 때 유행했었습니다. 사람의 인정 욕구, 사람은 본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으면 아무리 큰 고생이라고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쉬운 일이라고 하기 싫어집니다. 교육적으로도 인정은 효과가 큽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수고한 뒤에 하나님이,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역시 인간적인 성정을 모두 포기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도 가능하면 서로를 인정해주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종의 자세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만큼 했다는 자세가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손해 보는 일일까요? 세상의 가치관으로 교육을 받고 성장한 우리가 찾아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자기 무능력에 대한 열등감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하고 솔직한 통찰이며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특히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태양이 우리를 위해서 빛을 내지 우리가 태양을 위해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오늘 우리의 물질 중심적인 삶을 보십시오. 전쟁과 폭력을 보십시오. 남북의 갈등을 보십시오. 지역감정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걸 모른다면 교만입니다. 교만이 죄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믿음에 집중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들여다 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자신이 뭔가 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겨자씨 믿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종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종됨의 실존에 집중해야합니다.

이런 삶은 종같이 비굴하게 느껴지시나요? 니체가 비판했듯이 ‘노예근성’인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영적 시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히 11:1)
우리는 무엇을 바랍니까?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구원을 소망합니다. 믿음은 그것의 현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종국에는 승리하셔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믿음은 그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전혀 새로운 세계의 확실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맺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내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종됨’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사로잡힌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로 심겨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파리중앙 성도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이런 믿음의 세계를 맛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