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9일 성령강림 후 제18주 (2022년-41호)

제목 :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

본문 : 예레미야 29:1, 4-7, 디모데후서 2:8-15, 시편 111편, 누가복음 17:11-19

【누가복음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님의 날, 주님 앞에 나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예배에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서로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달력을 보니까 오늘 주일이 2022년의 41번째 주일입니다. 한 해가 52주일이니까 오늘 제하고 나면 11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속절없이 흐르는데,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만족스럽게 살고 계십니까? 주님이 우리 생에 동행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의논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놀라움

오늘 복음서를 주중에 읽는데, 복음서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맺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안 믿어질까봐 걱정스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그냥 교회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마는 것. 이 점이 제일 염려스럽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넘기고 나면 내 신앙이 아니라 남의 신앙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생을 열심히 목회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더니 하나님이 “너는 누구냐?”고 여쭙길래 저는 한국 땅 어디에서 목회하다고 온 아무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교인이 얼마나 모였냐? 일주일에 설교는 몇 번 했느냐? 헌금은 많이 모였느냐? 이런 질문은 일절 하지 않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너 지난 가을 설악산 단풍 봤냐고 여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목회하느라 바빠서 못 봤다고 하자 하나님이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겁니다. “내(가) 너 그거 보라고 세상에 보냈는데…?” 하나님이 설마 설악산 단풍 하나 보라고 생명 주셨을까요? 라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이 말이 뭔가 옳다는 생각이 안드시나요?

인생은 짧은 시간입니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바라보려는 것, 또 이것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모난 채로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하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 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믿어라, 이거 해라, 저거 하지마라”는 교리 모음 체계가 아닙니다. 신앙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분의 목적에 맞게 살게끔 하는 것이고, 그 본을 위해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 속에 오신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 중 하나의 사건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복음서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배를 계속 참석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체로 누가복음이 올해의 예배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을 매주 봉독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서 말씀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고 지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행을 가거나 어디 낯선 곳에 가게 되면 내가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인지 지도를 보아 확인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가운데 벌어진 일을 아주 길게 서술합니다. 누가복음이 24장까지 있는데, 9:51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라고 말씀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계속 되는데, 이 예루살렘 여정 중에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많은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 중에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일까? 하면, 그 핵심이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일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붙들어야 할 삶의 원리, 이웃 사랑의 실천 등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예루살렘 여정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사마리아 사람과 편견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11절)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유대 사람들이 바빌론에 식민지 생활을 할 때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유대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상종 못할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아프고 슬픈 역사가 그 땅에 살던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슬프고 아픈 일들이 역사 속에 배어져 있지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욕설 같은 단어이지만 ‘화냥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품성이 좋지 못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말은 실은 ‘환향녀’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고향을 떠난 적이 있다는 말이지요. 강제로 남의 나라에 노예로 끌려가서 온갖 수치스런 아픔을 겪다가 살아서 돌아온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아픈 역사지요. 이 아픈 역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단어 속에 스며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참 특이하고 특별합니다. 유난히 사마리아 사람이 누가복음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10장의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출신의 나병환자가 그렇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파격적인 주장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모욕으로 느껴졌을 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 성격이 원래 과격해서일까요? 성격이 모나셔서 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봅니다. 이 시선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 사람을 하나님의 뜻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편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 역시 편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편견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짙어질수록 좋은 신앙, 굳건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지배했습니다.
우리도 늘 그렇지만 한번 편견에 사로잡히면 그 편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우리의 영혼을 후려칠 때, 우리는 번뜩 놀라게 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휘두르던 나의 편견과 아집을 깨닫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너무 멋지지요?
우리 속에 있는 거대한 편견이 무너지지 않는 한 저 광대한 신앙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을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가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주님은 절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 내려앉은 인종, 피부색, 출신 지역, 경제력, 남녀, 성적 지향 등의 문제로 인해 세상은 조각나 있습니다. 차이를 존중하기는커녕 별것도 아닌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일이 많습니다.

-나병환자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17:11)는 말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읽는데, ‘사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띕니다. 사이는 어떤 사건이 시작되는 장소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사이에 존재하신 분이지요. 이런 예수님이 한 마을과 다른 마을 사이 마을을 지나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만났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로 만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멀리서 목소리를 높여 주님께 말했을 뿐입니다. 조금 애달픈 장면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우리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주님을 내 삶에서 만나는 순간, 내 영혼이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진 채 주님을 불렀을까요? 바로 사회적 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접촉하는 사람은 불결한 사람입니다. 특히나 종교적으로, 예배적으로 (제의적으로) 사람을 불결하게 만드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나병환자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선뜻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마을 가까이 갈 때면 얼굴을 가리고 ‘불결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애와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몸이 성치 못한 것도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거기다가 사회적인 차별이 더욱 그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들이 말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나병환자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예수님은 거의 즉각적으로 고통과 소외 속에 사는 이들의 아픔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이런 고통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는 것은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세상의 아픔에 애처로워하는 마음이 즉각적인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예수님의 처방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간단하고 명료한 말씀입니다. 그들의 몸에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안수 기도를 해주신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전히 나았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일상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은 그런 절차를 밟으라는 말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즉각 그 말을 이해했을까요?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즉시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돌아서서 제사장을 만나러 가다가 문득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 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실천이 뒤따릅니다. 이 둘이 빈틈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창 1:3)

-고통의 지점에서 만나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지대에서 만난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했고, 결국 바라던 것,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치유 사건은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누가는 이후에 벌어진 일에 주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병이 나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지체 없이 말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왜 굳이 누가복음 저자는 이 말씀을 끼워 넣었을까요?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이 됩니다. 하필이면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 자신들의 동족인 유대 사람들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듣는 청중들이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 아홉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사이지역, 접경지대를 지나고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접경지대인 만큼 유대 혈통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 혼혈의 사람도 당연히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깊이 앉아 있으면 이런 생각도 납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것,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들 사이에는 그런 차별도 없고,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도 없어 보입니다. 아픔 앞에서는, 고통 앞에서는 모든 사회적 차이가 없어집니다.

큰 고통을 겪은 분들이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큰 아픔을 겪고 난 뒤에 보니 예전에 움켜잡고 아웅다웅 하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더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문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나병환자들 사이에는 오히려 차별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큰 고통과 위기 앞에서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계급적 차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입니까? 아픔과 서러움의 깊이에 다다른 이들은 그런 차이에 몰입하지 않습니다. 아픔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을 가르고 서로 장벽들을 치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잘 압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자부심은 세상을 갈라놓지만 아픔은 세상을 일치시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을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나무 덩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란 세상의 온갖 모순과 아픔이 중첩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구원의 자리

자기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허둥지둥 제사장을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께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그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고, 오직 한 사람이 돌아섰습니다. 아홉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신 분에게 주목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물을 준 사람을 잊곤 합니다. 문제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훈련이 필요한 삶의 습관입니다.

-구원하는 길에 동참하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신비와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삶에 매몰되어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지난 주 미국 대통령은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를 꺼냈습니다. ‘아마겟돈’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전장터를 일컸는 말입니다. 러시아와의 핵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말들이 들려옵니다. 이런 때 우리는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일에 반대해야 합니다. 사회운동을 나가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쟁을 반대해야 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일에 반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일입니다만 인간적인 일만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육신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지향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치유 받은 자의 기쁨을 잠시 뒤로 미루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온 이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삶이 건강해짐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복음 이어지는 말씀 21절을 이어서 읽어 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죽어서 가는 곳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영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살이 가운데 있습니다. 이 세상살이 속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인지, 악의 소굴을 이룰 것인지 우리의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