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 성령강림 후 제20주 (2022년-43호)

제목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본문 : 요엘 2:23-32, 디모데후서 4:6-8, 16-18, 시편 84:1-7, 누가복음 18:9-14

【누가복음 18:9-14】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인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예배에 함께 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서로 인사하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글을 읽다가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시는지요?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 아시나요? 이 그림에 보면 아버지 앞에 누추한 옷차림의 아들이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아버지는 두 손으로 아들을 등을 이렇게 감싸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설명에 의하면 오른손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어머니의 손이고, 왼손은 아들을 품는 강인한 아버지의 손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어요?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특징과 어머니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계신 분으로 이해하니 마음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는데 너무나 멀리, 너무나 무심한 채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아닌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주님께 청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비유는 누구를 향하는가?

오늘 말씀의 첫 구절을 보십시오. 첫 구절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 비유를 누구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가? 입니다. 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냥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 상태로 머물지 않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진화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단박에 이 두 사람을 마음속으로 비교할 수 있게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하나님께 충실하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에 반해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사회상에서는 비교조차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내놓습니다. 불 보듯 뻔한 결과 아닌가요? “신앙의 모범생과 신앙의 불량학생 중 누가 신앙이 좋은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대답을 내놓으십니다. 그 속에 오늘 말씀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구인가?

바리새파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당연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들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리새인 같다’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 말만 들으면 ‘바리새인, 바리새파 사람’이 뭔지는 정확히 잘 몰라도 뭔가 ‘위선적이고 교만한 사람’이라고 대충이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입니다. 그렇지요?

바리새파 사람이란 실제로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기 300년 전 즈음에 유럽을 군사적으로 휩쓸었던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중해 근방의 모든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오늘날 인도 인더스강 유역까지 왔던 점령했던 사람, ‘알렉산더 대왕’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 들어보셨지요? 이 사람이 온 세상에 자신의 문화의 영향력을 널리 펼쳐놨습니다. 그것을 ‘헬레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사시던 땅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돈 많고 잘나가는 사람들은 헬레니즘 양식으로 도시를 만들고, 집안을 꾸몄습니다. 당연히 헬라적인 신앙도 받아들였겠지요. 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신앙을 철저하게 유대교 율법 아래 든든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신앙에 더욱 철저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더욱 견고히 했던 부류의 사람들을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신앙적인 사람들이고, 아주 율법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냥 나쁜 사람들, 예수님을 괴롭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보자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을 더욱 세분화하고 정교하게 나누었습니다. 율법을 613가지 계율로 나누었습니다. 248개 율법은 ‘-해라’는 명령의 율법이고, 365개 율법은 ‘-하지마라’는 금지의 율법입니다. 살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통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서는 이 계율의 준수 여부에 따라 이것이 ‘신앙이 좋다, 나쁘다’의 기준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에게 이런 계율이 있습니다. ‘안식일 법,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에 따르면, 예를 들어 보자면, 화장실 가서 일볼 때 휴지를 뜯는 것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황당하지요? 그래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화장실에 사용할 휴지를 뜯어서 모아놓습니다. 건물을 올라갈 때도 몇 층 버튼을 누르는 것도 노동이기 때문에 안식일이 되면 전 층 버튼이 다 눌러져 있는 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는 일을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 산책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것은 걷는 노동인가요? 아닌가요? 산책도 2000보까지는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2000보를 넘어가면 안됩니다. 말로만 들어도 벅찹니다. 예수님 시대에 6000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 바리새인들의 신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옳지 않은 것이 항상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못난 자부심입니다. 못난 자부심은 금방 부풀어 오르기 마련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자기를 과시하는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으로 멈추지 않고, 타인에 대한 멸시, 타인에 대한 차별로 진화합니다. 멸시와 차별을 통해서 자신을 드높입니다. 그야말로 못난 자부심입니다. 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인간의 속마음을 예리하게 간파하셨습니다.

-세리는 누구인가?

이에 대비해 ‘세리’라는 신분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리는 말 그대로 세금을 걷는 공무원에 해당이 됩니다.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것이 뭐가 얼마나 잘못되었길래 이토록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했을까요?

우리는 세리를 세금 걷는 공무직의 사람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 시대의 세리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땅과 이방 땅의 경계가 되는 국경 지역에서 근무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여리고 도성, 그러니까 요르단과의 국경 지역에서 근무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난 곳이 바로 국경 지역인 여리고입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가버나움 지역, 시리아, 레바논의 접경 지역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세금을 책정하고 거두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는 일은 엄청나게 큰 권력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경제적으로 파산시킬 수 있는 권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이 사람들 세리들은 이런 일을 했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폭리를 취했습니다. 무역을 하는 이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겨서 사기꾼 취급을 당할 정도로 악랄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일을 했으니까 이방 사람들과 매국노, 협잡꾼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방 사람들과 늘 접촉했기 때문에 불결한 사람들로 취급 받았습니다. 세리 입장에서 본다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세리들은 회당이나 성전에 나가서 예배에 참석도 금지되었습니다. 불결한 존재들이니까요. 하나 더 말하면 세리들은 범죄 현장을 목격해도 증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백정이나 광대 보다 못한 천민,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 세리입니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요? 이왕 세상에서 이렇게 취급받으니 ‘더 악랄하고 간악하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돈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삶의 여건이 메마르고 강퍅할수록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세리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가 와서는 이들 세리들과 먹고 마십니다. 이들과 거리낌 없이 사귑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리고, 말섞기를 거절하는 세리들에게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이 복음서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예수님의 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 비유에 등장하는 두 번째 사람, ‘세리’입니다.

-성전에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두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한 사람의 모습은 어깨를 펴고 주저함 없이 당당합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성전의 맨 앞에 나가섭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상상이 되시지요? 그는 성전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기도를 들으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훌륭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을 칭찬할만한 말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입니다. 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절제된 삶을 살고 늘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지만 머뭇거리는 태도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걷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도 가장 구석진 곳을 찾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내고”입니다. 이 사람은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미사여구도 없고 덧붙여 설명할 말도 없는 기도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이 두 사람을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우리의 선택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바리새인을 신앙이 훌륭한 의로운 사람이라고 지목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요? 이 문제를 놓고 말씀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안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혼잣말로 기도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그래서 불어 성경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riait en lui-meme” 기도하다의 동사 ‘prier’와 함께 쓰인 표현은 ‘자기 자신 안에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제게 크게 느껴졌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오르지 못하고 자신의 독백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고로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것도 ‘깊은 대화’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독백으로 그치고만 것이 이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자신의 공적을 늘어놓는 것으로 끝내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의 모습1 :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경건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경건을 자랑거리로 삼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있지만 사실은 사람을 향해 돌아서 있습니다. 그는 가끔 죄를 짓더라도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사는 사람만 못합니다. 그의 경건함이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바리새인의 모습2 : 그러나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멋대로 등급을 매기고, 딱지를 붙이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광고판에 이런 것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 몇 명의 얼굴사진이 있고, 그 이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가난이란 에티켓을 붙이지 마세요.” 그가 겪는 가난보다 더 가혹한 것은 사회적인 딱지일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 중에 “나는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의 폭력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의 말속에 담긴 멸시의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에게 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리의 기도

그에 비해 세리의 기도 말은 너무나 초라하고 단순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내용은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기도할 것이 없다고, 기도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기도 말을 가지고 가십시오. “주님,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은밀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늘 살피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위로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부차적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것, 구해야지요. 하나님께 자신의 속내를 속속들이 말씀드리는 것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간단하고 명료한 말씀 속에 우리를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기도 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셨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맺는 말

기도가 어려운 세상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기도를 해서 뭐하냐는, 기도를 비웃음으로 대상으로 삼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기도하는 일 보다 더 바쁘게,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의 기도는 그날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낭비한 시간, 이기지 못한 유혹들, 연약함과 낙담 속에서 일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나 우리의 생각에서 나타나는 무질서함과 방종은 종종 아침기도의 소홀함에서 비롯됩니다.”

기도가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도가 없는 내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주저하고 거절할 때 우리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입술에 “주님, 저에게 자비를, 하나님, 온 세상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의 말이 흘러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