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본문 : 말라기 4:1-6, 데살로니가후서 3:6-13, 이사야 12장, 누가복음 21:5-19
【말라기 4:1-6】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이니, 너희가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누가복음 21:5-19】
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치고, 나라가 일어나 나라를 칠 것이다.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생기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겨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호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하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의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줄 것이요, 너희 가운데서 더러는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 »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참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서로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차갑습니다. 축축하고 음습한 유럽의 전형적인 짙은 가을날입니다. 가을이 결실의 계절인 것을 잘 알려주는 것은 나무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무들을 보면 모두 똑같아 보여도 각각의 나무가 각각 자신만의 색으로 단풍이 드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가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색으로 물드는 것이 가을입니다. 문득 우리의 신앙도 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특질을 잘 발휘하는 것이 신앙이기도 하고 생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왜 너는 뭐를 하지 않았니?”가 아니라 “왜 너는 너답지 못했니?”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이 가을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끝이 있다
지난 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해야만 하는 ‘시대정신’을 선포했던 학개 선지자의 말씀을 나눈 바가 있습니다. 학개는 성전을 통해 신앙과 삶의 구심점을 삼으려고 애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성전은 이토록 고귀하고 존귀하고 거룩한 곳인데, 오늘 우리가 만나는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조금은 두렵고 참혹한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냉정한 것 같지만 마지막은 늘 이렇습니다. 한 개인의 마지막도 그렇고 인간의 역사 속에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던 대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세운 것은 언제나 마지막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 삶도 언젠가는 끝이 있지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끝 날, 언젠가는 반드시 올 그 날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너그러이 품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예부터 교회 전통에서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영원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의 초점은 마지막, 끝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시대
오늘의 구약성경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삶은 고달팠고, 희망을 꿈꿀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눈에 비친 모습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삶에서 한 자락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그 의미, 그 희망을 상실하는 순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신앙의 중심축이 될 만한 것이 없었을까요? 성전이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 이후 시대이니 당연히 새로 세운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라졌을까요?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 예배는 진정한 헌신도, 참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도, 감격도,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도 없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교회에 나오지만 신앙은 없는 사람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어느 기사에서 보았습니다만 요즘 한국교회 교인들이 규모가 작은 소형 교회로는 가지 않고 대형교회로 가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만나거나 사귀거나 마주치기는 싫고, 그냥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가고 싶어서’입니다. 뭔가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사실 이 모습은 올바른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예배란 공동체의 어우러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속에 친교가 있고 나눔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혼자서 예배를 이룬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고 싶지만 타인들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불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은 있지만 당신에게 얻을 것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일까요? 사람들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과 상황은 다르겠지만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는 신앙도, 정신도 말라버린 시대 같습니다.
이때 말라기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말라기(Malachi)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불의와 잘못을 말합니다. 백성들의 그릇된 생각을 지적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정성이 사라진 예배를 꾸짖고, 진정성이 없는 제사장들의 태도를 고발합니다. 하지만 그는 상처입고 낙심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전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죄지은 백성들에게도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비틀거리고 방황하고 되는 대로 살던 삶도 때로는 우리 인생에 있을 수 있지만, 인정합니다. 때로는 방황하고 마음이 흩어진 채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될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4:5)이라고 말합니다. 끝, 마지막이 연상되는 날입니다. 이런 때야말로 가장 어지러운 때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은 시대
참으로 옛날 이야기 입니다만 제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프랑스 빠리를 좀 안다하는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심하라는 겁니다. 몽마르트 언덕에 가면 야바위꾼들이 있는데 손안에 들어가는 작은 통 세 개를 놓고, 구슬 하나를 굴려서 어느 통에 들어있는지 맞추면 자신이 건 돈의 2배를 준다는 속임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교묘한 술책은 연습 게임을 할 때는 그 구슬이 어느 통에 들어가는 지 아주 천천히 보여줘서 누구나 맞출 수 있게끔 합니다. 그리고 관광객 중 하나가 실제로 돈을 걸고 그 게임에 참여하면 속임수를 써서 돈을 뺏습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사람들이 혹해서 그 게임에 참여하면 돈을 딸까요? 아니요. 다 잃습니다. 왜냐하면 연습으로 보여줄 때는 너무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실전 게임으로 들어가면 교묘하고 정교하게 주변 모든 사람이 서로 짜서 나를 속이려 들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너무 쉬운 게임이 아니지요. 뻔한 이런 놀이가 아닙니다. 밖에서 보면 쉽지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신앙적인 착각이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깝고, 왜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계속 고집할까?” 혀를 쯧쯧 차게 되는 장면이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는 듯이 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잘못된 판단을 하고, 우상을 계속 만들면서 광야 생활을 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남의 인생을 바라보면 참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감놔라 배놔라’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이 되면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맙니다. 올바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 바쁩니다. 이런 시대가 말라기의 시대이고, 또한 우리 시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때, 말라기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치 뼈대가 무너진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지고 휘둘리는 백성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례와 법도를 굳게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내 삶을 붙들기!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고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리, 그리고 이미 살 길을 마련해놓으시고, 사람들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말라기의 대책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엘리야의 이름을 꺼냅니다. 엘리야는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풍요의 신을 섬길 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끈 사람입니다. 그가 와서 할 일이 참 이상합니다. 뭔가 큰 일을 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가 할 일이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 즉 불통의 상황을 소통의 상황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믿음생활이 깊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내 삶에 기적도 벌어지고, 놀랍고 신기한 일들이 벌어질까요? 이런 비일상적인 어떤 큰 일이 아닙니다.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상의 삶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세대 간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 선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발전으로 보였겠지요. 하지만 부모 세대는 과거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신앙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낯선 타자처럼 바라보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인 수준으로, 이념으로, 세대간 갈등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무 우둔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다리 놓는 일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무너진 다리를 놓아,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다리도 점검해 보아야겠지요. 또한 내 마음 안에 연결되어야 할 분리된 지점이 없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분리의 담을 헐기 위해서입니다.
-성전 앞에서
예수님께서 헤롯 대왕이 지은 성전을 둘러보고 나오시다가 어떤 사람들이 아마도 제자들도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성전 건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가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지금도 생각해보면 예루살렘 성벽의 돌을 보면 도대체 그 시절에 이렇게 거대한 돌을 어떻게 날랐으며, 어떻게 다듬고, 어떻게 쌓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 웅장함에 얼마나 압도되었을까요? 그 웅장한 돌이며, 아름답게 장식된 봉헌물들은 그곳이 얼마나 거룩한 곳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찬탄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21:6) 뜻밖의 이야기에 당황한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주님께 물었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징조 없이 일어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개미가 행렬을 이루어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 큰비가 올 징조임을 압니다. 몸의 통증은 몸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미리 알려줍니다. 다가올 사건은 그에 앞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그 징조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엉뚱해 보입니다.
-미혹으로부터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8a)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에서 ‘속이다’라는 표현을 옛말로 하면 “미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미혹된다는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제 정신을 잃는 상태를 뜻하는 말일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기준이 없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내 몸인데, 누군가가 주인이 되어서 조종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합니다. 미혹됨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다른 주인이 나를 마음대로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미혹됨입니다. 성전 앞에서 성전의 화려함 도취된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그 안에 기쁨을 찾고 행복감을 찾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의 참된 기쁨이 있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구차하고, 번거롭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는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징조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리고 화려함으로, 웅장함으로, 매력으로 모든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만 화려한 성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훨씬 더 많습니다. 모든 시선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만들어 가시기 원하시는 일들은 귀찮은 일들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징조가 우리 눈에 보여야 할 텐데, 신앙의 시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텐데, 우리는 힘을 모두 잃은 것은 아닐까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지막 때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때와 시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징조가 있습니다. 삶의 모든 기준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람들의 시대이지 않을까요? 특히나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삶이 예수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것, 교회의 시대가 아닐까요?
이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붙들고 살아갈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재정이 많은 큰 교회와 그렇지 않은 작은 교회로 나눌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는 참 교회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 있는가?” 한 해를 정리하는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질문에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큰 건물로서의 교회당은 많지만 참다운 의미의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참 교회가 되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