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 연구 제1강
Ⅰ. 성서읽기의 당위성
우리는 성서를 읽어야 하나? 왜?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성서에 대한 신앙적, 가끔은 미신적, 개인적, 학문적인 관심 때문인가? 혹은 읽어야 한다는 어린 시절부터의 강요, 설교 및 교회에서의 어떤 이야기도 들어도 맥락이 잡히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서를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크리스쳔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 그 내용도 모르고 이루어 지겠는가? 어떤 종교인이 그 종교의 경전을 모르고 믿는다는 말인가? 크리스쳔이 성서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교회 특히나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세부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고 있기는 하나 성서라는 책이, 혹은 신앙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불행히도 말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성서읽기를 위한, 성서 연구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Ⅱ.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성서를 읽을 것인가?
1. 단순독서 행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건너 뛰지 않고, 취사 선택하지 않고 읽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성서를 통독하지 않고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성서의 세계, 인물, 시대를 숙지하는 것을 목표로, 읽고 암기하며 내것으로 삼는 것. 예) 우리 조상들의 글읽기와 유사 (천자문, 사서삼경 등)을 암송함으로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리 이해가 가지 않아도 1000번을 읽으면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즉 단순한 독서의 행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는 태도야 말로 신앙 생활의 기초 공사.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이새의 몇째 아들인가? 삼상 16:10-11 과 역대상 2 :13-15 읽어보자. 어느 본문이 맞을까? 어느 한 본문은 거짓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성서의 문학적, 신학적인 차이, 즉 신명기 역사가의 글과 역대기 역사가의 글의 차이를 알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읽기가 요구된다.
2.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읽기 : 쉽게 말하면 어떤 특정한 교리가 성서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를 입증하기 위해 성경귀절 여기 저기를 나열식으로 엮어가는 방법이다. 한국 기독교 서점에 나열되어 있는 성경 공부 교재가 상당수 이에 속한다. 예를 들어 보자. 속죄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출애굽기, 복음서, 서신서, 요한 계시록에 있는 해당되는 성경귀절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단순히 속죄론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창세기와 복음서의 속죄론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는 교리나 신조를 배울 때,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 여호와의 증인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논쟁에 본 적이 있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교리나 신조, 혹은 신앙 고백이란 것은 늘 시대나 환경에 따라 재해석되는 해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조, 혹은 신앙고백은 무엇이 있을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영국 장로 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등, 이렇게 교리와 신앙고백은 늘 시대와 역사적인 상황에 맞춰 늘 새롭게 고백되어왔다. 그렇기에 교리나 신앙고백이 성서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다시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속에서 하나의 교리, 하나의 신조만을 뽑아낼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앞에서 말한 속죄론(속죄론이 무엇인지 아시죠?)의 경우를 보자. 성서 속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예정설과 만인 구원설이 있다. 예정설에 해당하는 구절(엡 1:5, 11, 행 4:27-28)과 만인 구원설(요 3:16)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다.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예정된 자가 있다는 주장과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서술이 일치하는가? 오히려 상반된다.
우리는 동일성이라는 말과 획일성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성서 안에 여러 다양한 증언, 신앙, 신학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 복수적인 개념, 이야기, 사건들이 있다고 해서 성서가 동일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서의 증언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모두 신앙의 동일성을 전하고 있다. 또한 성서 본문의 표현이 다양하다고 해서, 그리고 때로는 같은 사실을 반복, 중복해서 말한다고 해서 성서가 획일적이라고 억지부려서도 안된다. 달리 말하면, 출애굽기와 호세아서에서 동일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 귀절들을 무조건 일직선 상에 놓고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각 권 하나 하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히 들어야 한다.
사실 교회사 속에서 성경을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2세기에 타티안이란 사람이 4복음서를 한권으로 편집하여 단권 복음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이를 거부했다. 왜일까? 나사렛 예수의 삶과 행적에 대한 서로 다른 네개의 증언이 있지만 획일적으로 통일, 짜집기 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네 개의 증언들 속에서 하나의 동일한 음성을 듣고자 한 것이 교회의 역사가 말하는 바다. 여러 다양한 증언들 사이에서 들리는 한 하나님 이야기,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다.
3. 새로운 읽기 :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태도를 넘어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성서는 하늘의 언어이면서, 또한 하늘의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쓰인 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성경을 오늘날 말로 하면, 하늘로 부터 온 팩스나 하늘로부터 다운로드 받은 문서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신비한 책이며, 신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므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책도, 하나님이 직접 불러 주신 것을 마치 필경사가 받아쓰듯이 한 자 한 자 받아쓴 책도 아닐 뿐 아니라 팩스나 다운로드해서 받은 문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상상하여 지어낸 허구적인 산물도 아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이자 증언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과 배경을 깔고 있지만 단순한 사실의 수집은 아니며, 과학자들의 실험 보고서 역시 아니다. 성경은 신앙의 공동체와 그에 속한 저자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건을 자신들의 역사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언어로 해석한 일종의 해석된 역사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건을 체험한 인간이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형상화한 다양한 형식의 문학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언어는 하늘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대와 상황을 살았던 사람들의 언어로 되어 있다. 성서는 한 사람이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순간에 쓴 책이 아니다. 거기에는 여러 저자(증인)들이 있다. 처음과 나중의 차이는 1000년 이상이나 되는 시차가 있다. 즉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그 말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글이 아니고, 특정 시대, 특정 장소, 특정 사회와 역사를 살았던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무슨 의도로 그런 글이 쓰여졌는지를 파악하려는 작업이다.
정리하면, 성서 본문에는 두 가지 차원이 숨겨져 있다. 역사성과 초월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성서의 역사성이란 특정한 시대와 상황을 살던 이스라엘 (최초의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차원이다. 또한 초월성이란 성서의 말씀이 과거, 그 시대의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말씀이 된다는 차원이다.
[출처] 구약성서연구 제1강 : 성서읽기 (파리중앙교회) | 작성자 Pasteur 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