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룩한 길
본문 : 이사야 35:1-10, 야고보서 5:7-10, 시편 146:5-10, 마태복음 11:2-11
【이사야 35:1-10】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 하고 말하여라.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마태복음 11:2-11】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날씨가 추운 겨울날씨입니다. 강림절 세 번째 주일을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반가운 인사를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해를 혹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묻어있는 어둠, 그늘진 부분들을 모두 안고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이 마음 녹여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며 오늘 말씀을 나눕니다.
강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믿는 이들이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가겠다.” 이 말씀에 대해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하고 간절한 소망과 바램을 담아 성도들이 전하는 말로 전하는 말로 성경은 끝이 납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 역시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시대였지만 “주님이 오시면…”하는 소망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소망을 품는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차원에서는 생물학적인 생명이 붙어있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생명은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채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죽었지만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이가 있습니다. 신앙은 ‘죽은 채로 살아가는 삶’을 연장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죽음을 넘어 정말 제대로 사는 법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것입니다.
-강림절을 환기하다
강림절을 시작하면서 4주간을 보내는 동안 내 마음 속에 촛불을 하나씩 켜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번째 촛불을 우리의 마음에 밝혔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모습은 더욱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더욱 밝아진다는 말은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의 시선이 더욱 깊이 다가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말씀을 읽으며 누군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데
창세기 24장을 읽어 보면 나이를 많이 먹은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 하나를 떠올립니다. 이 걱정은 무엇인가 하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 ‘이삭’입니다. 이 아들을 위해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서 역시나 자신의 늙은 종인 ‘엘리에셀’을 자기 고향으로 떠나보냅니다.
자기 고향에 가서 아들의 신붓감을 찾아보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늙은 종은 낙타를 끌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간절한 부탁이자 명령이겠지만, 엘리에셀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막연한 요청이었습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주인 아브라함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보아야 할까요? 생각은 많았지만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주인의 고향 어귀에 도착한 그는 잠시 성 바깥에 있는 우물곁에서 피곤한 몸을 잠시 추스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었겠지요.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저녁밥을 짓기 위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였습니다.
마침내 엘리에셀은 한 가지 기준을 세웠습니다.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신은 물론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소녀라면 하나님이 정해준 여인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서 “분별의 기준”으로 택한 것이 무엇인가요? 신앙이 좋아 보이는 여자였나요? 가문이 좋다는 처자를 찾았나요? 아니면 경제력을 우선으로 두었나요? 모두 아닙니다. ‘친절과 배려의 행동’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그를 돕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지금 이 천 년 전에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분이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나의 평범한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이들로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멀리하고 싶어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말 아닐까요? 기독교인들이 기다리는 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고 있다는 이 메시지를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해도 과연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요?
도종환 시인이라는 분은 ‘흐느끼는 예수‘라는 시에서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 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치는, 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라고 묻습니다. 이 시는 예수가 오시는 자리가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아픔의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초 하나를 켠다는 것은 이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현실의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광야의 사람 요한이 묻다
우리가 강림절에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 불렸던 사람입니다.
광야의 사람 요한은 이런 사람입니다. 백성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일깨워주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은 세상살이에 찌들어버리고 세상에 파묻혀 사느라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서 이미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것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이 소리에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복음서는 말하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3:5-6)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라고 번역된 ‘hamartia‘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 죄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의 사람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직접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느끼실 겁니다. “당신이 오실 그분, 예부터 오시리라 약속된 그분, 즉 하나님이 보내신 분, 메시아십니까?” 라는 질문이지요.
요한의 그 물음을 들으신 주님의 대답은 ‘맞다’ 혹은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만 주님이 계신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
-질문에 답하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질문을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주어질 수 있겠지요? 당연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요? 당황스럽습니다. 머뭇거리면서 나에 대한 소개를 몇 가지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파리중앙교회를 담임하는 아무개 목사로서 어디에서 나서, 어디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주절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마주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와 만난 사람들, 예수와 마주친 사람들 사이에서 더불어 벌어지는 ‘생명 회복의 사건’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치유하여 온전케 하고, 자기 존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누구인가?’ 하면 ‘나를 통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사람들이 나만 만나면 행복해집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하면, 나는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요. 어떤 누군가는 만나기만 하면 모두의 심사가 불쾌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이렇게 답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엔도 슈샤꾸’라는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이분의 작품들은 대개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이분의 소설 가운데 <사해의 호반>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예수님을 심문하는 빌라도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너는 저 의원들의 말대로 민중을 선동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합니다. “나는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인생을 가로질러…그들을 사랑하려고 했을 뿐이오.”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황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황제보다도, 예루살렘보다도, 로마보다도 오래 오래 계속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오.” “무엇이 로마보다 오래오래 지속되느냐?”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가 닿은 흔적이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가로질러 남겨놓은 흔적,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오.”(엔도 슈사꾸, <死海의 호반>에서)
-거룩한 길
나를 통해서 벌어진 일이 곧 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착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삶을 선택 할수도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봉독한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거룩한 길’이라는 삶입니다. 인간의 인생에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루트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끔 드는 생각이 ‘그 때 이런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때가 있습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모릅니다만 더욱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늘 남습니다. 우리는 늘 인생의 여정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인생의 길이란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거룩의 길을 떠올려 보십시오. 왠지 먹을 것도 맘대로 먹으면 안 될 것 같고, 행동도 조심해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인가요?
제가 여러분에게 흔히 ‘거룩 장’이라고 알려진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다음에 거룩한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9-10절)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이 말씀 잘 들으셨습니까? 거룩이란 내 밭에서 거둬들인 것이 전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곡식을 구석구석 거둬서는 안됩니다. 포도를 모조리 남김 없이 따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내 밭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 나그네 신세의 사람들을 위한 몫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룩이라니 이해가 되십니까?
-말씀 맺기
강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한 길, 인생의 길을 취하고 그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명령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길이라는 제시입니다.
인간의 욕망만 부추기는 세상을 쫓아가자면 우리는 고통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벌판에서 허덕이며 사는 우리들도 가끔은 광야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거칠고 게으르고 나태한 영혼을 일깨우는 말씀과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따뜻하게 감싸 안으시고, 우리와 진정으로 만나는 주님의 사랑과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길에 대한 초대에 진심으로 응하시는 파리중앙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