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 : 이사야 52:7-10, 히브리서 1:1-4, 시편 98편, 요한복음 1:1-14
【이사야 52:7-10】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 하는구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인사
성탄절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다함께 축하합시다. 조금 쑥스러울수도 있지만 “Joyeux Noel! Merry Christmas! 복된 성탄 맞으십시오!” 라고 인사 나눠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분이 세상에 마침내 오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탄이 의미 있으려면 우리 마음을 주님께 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연말연시 들뜨고 할 일도 많고, 방문하거나 만나야 할 사람도 많겠지만 여러분 자신 스스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맞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올해 달력은 성탄주일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참 무겁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무게를 달아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 마지막 수업, 마지막 유언’이라고 붙여본다면 어느 누구도 가벼이 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기에 마지막이 있지요. 하지만 이 마지막 주일을 여러분과 함께 성탄주일로 지킬 수 있어서 참으로 좋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는 말씀의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성탄
저는 이 성탄의 날에 여러분과 함께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아니 어떻게 말하면 “나누고 싶다”가 아니라 “나눠야” 합니다. 교회를 다닌 연차가 좀 되고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요한복음의 1장의 말씀은 성탄절 아침에 읽는 단골 말씀입니다. 단골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음식 고르듯 각자 개인 취향에 따른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교회는 수 백 년 전부터 요한복음 1장을 3년마다 읽는 성탄절 말씀으로 지정하여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성탄절 말씀인데 예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수님 탄생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나 말구유 이야기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에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이 네 개의 복음서는 각각이 나름대로 예수 탄생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가복음은 예수 탄생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한 마디로 “임마누엘”(마 1:23)이라고 요약정리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예언자들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 바로 예수 탄생입니다. 이 세상살이에서 외롭고 쓸쓸하고 거기에다가 두려움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과 든든함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가는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들려온 천사들의 노래로 성탄을 맞이합니다. 뭔가 훨씬 더 이야기적 특성이 강합니다. 천사가 전하는 말은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눅 2:10)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 그리고 “참 빛”(요 1:9)이라고 소개합니다.
2000년 전 예수께서 오실 때도 그랬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도 든든하지 못하게 하는 불안과 기쁨은커녕 좌절과 낙망으로 또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은 삶의 연속입니다. 예전에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지배자들의 폭정이 원인이었다면 요즘 우리의 현실은 전기세, 대출금, 사람사이의 불화와 갈등 등이 우리 삶의 터전을 흔듭니다. 이런 것들로 우리 삶이 가득 메워질 때, 이런 우리 시대에 주님은 “든든함”으로, “기쁨”으로, “빛”으로 오고 계심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신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오늘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태초에
그 첫 번째 단어는 ‘태초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성탄절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뭔가 화려하고 잘 포장된 선물을 주고받고, 또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 요셉과 마리아, 목자들과 동방박사 등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이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었는데 요한복음의 첫 단락은 뭔가 쉽지가 않고 난해해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태초에’ 이 단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 머리에서 연상되어 연결 되는 말씀은 창세기 1:1의 말씀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씀입니다.
‘태초’라는 단어만 가지고도 아마도 수 백 개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정리할 수 있는, 성경이 말하는 태초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최고, 최대, 인간이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그 처음의 그 너머’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그런데 그 처음에 창세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모든 것의 뿌리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배어 있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그렇다는 선언의 말씀입니다. 창조의 목적이지요.
-로고스
그런데 이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는 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에 로고스라는 단어를 끌어들였을까요? 그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미 태초부터 존재하셨다고 해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헬라어도 잘 하고, 헬라철학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정확하게 전하려고 로고스를 거론한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읽는 우리도 이 단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했다.’는 이 선언이 있습니다. 로고스는 이 세상을 조화롭게 끌어가는 힘입니다. 로고스가 있기에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굴러갑니다. 로고스는 존재의 근원이며, 생명의 토대입니다. 어려우신가요? 헬라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로고스는 이런 뜻입니다.
제가 로고스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제 손에 든 물체가 있습니다. 이것을 놓으면 어떻게 되지요? 떨어집니다. 중력이 작용하기에 그렇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이 중력의 원리에 영향을 받지요. 그런데 직접 물체를 놓아야만 중력이라는 원리가 실현이 됩니다. 이미 떨어질 것을 아는 것은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실제로 놓으면 원리가 실제로 실현이 됩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처음 독자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원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이성, 원리, 근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로고스입니다. 이 ‘로고스’를 성경은 말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그 맨 처음에 신적인 존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실제로 구현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뿌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창세기의 고백이라면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구현되었다. 이 말씀입니다. 요 1:14절은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 상식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그런 생각들이 은근히 배어있습니다만 육적인 것은 천한 것이고, 영적인 것은 고귀하다고 여깁니다. 또 육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영적인 것은 완전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자, 하나님이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처럼 괴로워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존재라고 말해도 될까요? 하나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는 존재인가요?
뭔가 하나님께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 같지 않나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고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이 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직접 사람이 되셨나요? 무엇보다도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너무 이상하고 낯설게 다가옵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뭔가 뿅하고 하나님이 다 구원하시거나 다 처리하시면 더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사람이 직접 되시기로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기독교가 갖고 있는 대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사랑의 표현의 최고의 정점은 “사랑은 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닙니다. 사랑의 완성은 “사랑하기에 내가 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 사랑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요한복음에 대한 어렵고, 난해한 설명도 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녹아 사라집니다. 오롯이 남는 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해 사랑만 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분이 내가 되시기에 그리고 나도 그분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요 1:4절을 이렇습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요한은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태초의 말씀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요한을 비롯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생명의 빛으로 경험한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이건 바로 우리에게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경험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해 생명, 즉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여름, 한 창 여름 휴가철에 어떤 분이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사치레로 “휴가를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더니 부르고뉴 디종 근처의 어느 산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거기가 내가 모르는 유명한 관광지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왜 그곳에 가시냐?”고 물었더니 그 곳이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 강의 발원지 La source de la Seine 라고 하시더군요. 이 곳에는 아주 작은 여러 샘? 물웅덩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초라하고 볼품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작은 물줄기를 ‘하늘의 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작고 초라하고 볼 것 하나 없는 그 샘에서 솟아난 샘물이 온 대지를 가로지르며 온 대지를 적십니다.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곳 파리까지 흐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목마른 모든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하늘의 샘물이시죠. 또한 어둠에 갇혀 헤매는 사람들에게 꺼지지 않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기쁨을 맛본 사람들의 마음에서 조금씩 솟아나는 것은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안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일들로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분주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만들며 삽니다. 삶이 그야말로 전쟁터이지요.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들 가운데 평화로 오셨습니다.
-평화를 만들다
이 이야기는 1981년 영국 BBC 방송에서 방영한 <무인지대의 평화>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4년 12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플랑드르 전선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은 100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전날까지 치열한 총격전으로 수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 지 죽은 동료들의 시체 하나도 거둬들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치열한 전장에서 어느 누구 하나 숨소리도 맘껏 내뱉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병사 하나가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노랫소리가 어둡고 긴 전쟁터에 울려 퍼졌습니다. 말없이 그 노래를 듣던 병사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곧 모든 병사가 부르는 성탄 합창단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한 병사가 “Merry Christmas” 하고 외쳤습니다. 그 후 병사들 사이에서 흥겨움에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모두 총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저절로 휴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는 축구 시합도 벌어지고, 갖고 있던 음식도 나눠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널려져 있던 동료 병사들의 시신도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만나고 보니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성탄절의 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기적인가 하면 평화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탄절은 이런 저런 설명이 필요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탄은 흥청망청의 날이 아니라 평화의 주로 오시는 분.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릴 운명의 한 아기를,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로부터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날입니다. 오늘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는 노엘, 크리스마스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면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를 예배함이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이 우리 삶에서 내동댕이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아기 예수로 오시는 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