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5일 주현 후 제 2 주 (2023년-03호)

제목 :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본문 : 이사야 49:1-7, 고린도전서 1:1-9, 시편 40:1-11, 요한복음 1:29-42

【이사야 49:1-7】 5-6절만 봉독!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5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7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요한복음 1:29-42】 35-42절만 봉독!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
35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 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 그들은 «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인사 나누겠습니다.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마음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영혼의 심호흡을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환기시키는 의미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교회로 나오실 때 무엇을 보셨나요? 무엇을 만나셨나요?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보셨을 것이고, 비가 왔으면 비를 만났을 것이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어떤 마음이 생겨가지고 주님 앞에 오셨는지요? 잘 기억이 안나실 겁니다. 왜냐하면 보았지만 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누군가와 마주쳤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였지만 내 영혼의 구원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의미 없는 시간일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참 알맞게도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첫 마디가 이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시간에 교회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오셨느냐? 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을 잊지 마시고 말씀이 마치는 때까지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두 본문이 말하는 바

오늘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이사야 말씀과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다소 본문이 긴듯하여 조금 단축하여 읽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오늘 두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 그것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오늘 본문의 공통점이라고 할까요? 그 점을 발견하셨는지요? 한번 찾아보십시오. 두 본문의 공통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주제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주제가 공통적인 것이 있지요? 오늘 이 두 개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백성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또 요한복음에는 제자들과의 첫 만남을 통해 부르심이라는 주제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4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아시는 분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없나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미디안 평원에서 양치면서 살아가던 사람 아시는 분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인물 아시지요? 우리는 3-4000년 전 그 땅에 살던 사람들 하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아브라함도 알고, 모세도 압니다. 어떻게 알까요? 성경에 있어서 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부르심을 받았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께 NO 라고 대답하면 부르심이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이 두 사람만이 아니겠지요. 그 많은 예언자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라고 응답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로 가져와 본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누구를요? 저를, 그리고 여러분을 말입니다. 저의 이 말에 여러분이 ‘에이!’ 하고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한 법입니다.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면 여러분을 위해 계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여기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 시대 당시 모습을 보면 아직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없었을 때인데,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제자 그룹이 있었습니다. 왜요? 왜 사람들은 생계를 접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먼 곳에서부터 와서 요한을 따르고,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요한이 실천하던 광야생활을 함께 배우고자 했을까요? 갈증 때문입니다.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야 너가 만족(행복)을 얻을 수 있어! 살만한 인생이야!” 하고 말하는 세상적인 요구가 있지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돈도 벌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명품도 사고, 결혼도 했지만, 하지만 갈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채워야 할 것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채워야 할 영적인 허기를 다른 것으로 아무리 채워봤자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알아차려지는 것이 신앙이 시작되는 첫 단계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심령 속에 이 갈증, 이 목마름을 깨닫는 시간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어느 날 이렇게 제자들로부터 존경과 우러름을 받던 요한이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입니다. 왜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을 부를까요? 어린 소나 다른 짐승이 아니라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출애굽 당시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사건이 이 사람들 마음속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자를 죽이러 온 하나님의 천사를 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일을 기억하시죠? ‘유월절’이 시작된 사건입니다. 이 때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을 대신 담당한 상징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곧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상 어떤 그룹도 그렇겠지만 늘 이렇듯 결단력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이 따라 오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 물으시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 잘 들으셨습니까? 이 물음은 예수님을 따라온 두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첫 단계 -뭔가 어긋나 있구나, 내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구나- 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질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불현 듯 갑자기 불어온 바람처럼 서늘하게 다가오는 질문이지요. “내 인생에서 찾고 있는 게 무엇이지?” 이제 내가 그토록 찾아왔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또 다른 계단을 오른 사람입니다.

-가서 보니

이제 두 사람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깊은 관계로 한 단계 더 진입합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하셨기에 예수님이 묵으시는 곳에서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냅니다. 안타깝지만 어떤 일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우리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 사람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지요.
이 두 제자가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보았겠지요. 그렇게 느꼈겠지요. “이 분이야 말로 내가 그토록 목마름을 느끼던 그 목마름을 해소해 주실 분이구나.”하고 느꼈겠지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는 형제가 있는데, 형이 예수님의 첫째가는 제자가 된 베드로였습니다.

안드레가 형 베드로에게 한달음에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분을 만났습니다. 신앙의 단계로 말하자면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을 딱 마주 대하는 순간, 이 순간이 제자 안드레에게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에게도 이 순간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런 감격으로 형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옵니다. 좋은 것, 귀한 것은 정말로 가까운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4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 교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3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잘 들으셨습니까? 이 말씀 가운데 제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왜 오후 4시라고 언급되어 있을까요? 좀 뜬금없이 느껴지지 않나요? 갑자기 시간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합니다. 느닷없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자, 이 말씀을 놓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찾아온 생각입니다. “내 인생은 몇 시쯤이지?” 오후 4시쯤 되지 않았을까? 여러분 인생은 몇 시를 지나고 있습니까?
제 기억 속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한창 젊은 시절에, 밤늦도록 친구들과 새벽녘까지 놀다가 늦게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오후 4시경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루 다 지나갔네” 이 생각입니다.
오후 4시를 떠올려 보십시오. 뭔가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꽤나 늦은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하루가 다 지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에 불이 붙은 것이지요. 그 때가 하필이면 오후 4시입니다. 새롭게 뭔가를 시작해도 될까요? 요한의 제자였으니 요한에게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신앙이란 것은 늦은 것이 없습니다. 나이 몇 살에 신앙을 갖게 되었든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점이 이 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에 인생을 맡겨 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제 말에 불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죽은 나뭇가지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를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이 있는 것만이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힘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신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거친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던 사람, 촌사람, 시골 사람, 배운 것이 없는 사람’에게서 반석을 보셨습니다. 이 반석은 앞으로 교회의 반석과도 같은 존재가 됩니다.
자,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가능성, 베드로 안에 숨겨진 반석으로서의 잠재성을 보셨습니다.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타인에게서 가능성, 잠재성을 발견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런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신앙은 이렇게 멋진 일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서 내 인생에 숨겨진 잠재성을 일으키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싶어하십니다. 평가하는 세상적인 시선은 내려놓으십시오. 크고 좋은 일, 멋지고 빛이 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나의 가능성을 이끌어내 주시고 내 인생을 북돋워 주시면 우리 인생은 훨씬 아름다워집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인생의 보람, 신앙을 제대로 갖는 일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38절의 말씀, 예수님의 질문을 기억하시기를 권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우리 인생에서 정말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인생에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 인생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는 용기와 힘과 능력이 필요한데,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길이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의 자리로, 기도의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여정에 하나님이 우리를 간절히 부르시니 이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