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2일 주현 후 제 6 주 (2023년-07호)

제목 : 생명을 택하십시오.
본문 : 신명기 30:15-20, 고린도전서 3:1-9, 시편 119:1-8, 마태복음 5:21-37

【신명기 30:15-20】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3:1-9】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 나는 바울 편이다 » 하고, 또 다른 사람은 « 나는 아볼로 편이다 »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인사합시다.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날입니다. 이 시간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주님께 들여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의 이 시간, 주님께 귀하게 드려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온 세상에 평화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사 나눕시다.

지난 한 주간 뉴스를 통해서 가슴 아픈 소식들을 우리가 듣게 되었습니다. 투르키예와 시리아 국경 사이에서 큰 지진이 나서 아직도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고, 생존자를 무너진 건물에서 찾고 있습니다. 십 여년 전 제가 여행 하면서 들렀던 도시 ‘가지안테프’가 사고 지역으로 뉴스에 나와서 무척이나 당황스럽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과 만났던 시장 거리, 골목길이 아른 거려서입니다. 오늘 아침에 본 소식에 따르면 사망자만 2만 5천 명, 추정으로는 십 만 명이 훌쩍 넘는 사망자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존자들을 어서 빨리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슬픔과 교만

그런데 뉴스를 지켜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화면의 거의 전부는 투르키예 지역의 재난 현장입니다. 지진은 투르키예와 시리아 국경 지대를 걸쳐 일어났는데, 우리는 시리아 지역의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일까? 하필이면 시리아 땅 그 지역이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1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내전을 벌이고 있는 곳인지라 전 세계 많은 구조대와 자원 봉사자가 왔지만 접근이 어렵다는 보도를 듣게 됩니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돕기 위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전 세계 사람들이 쉽사리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우선 우리에게 드는 마음은 첫째는 슬픔입니다. 안타깝지요. 생명이 저곳에 있는데, ‘긴급히 움직이면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데, 먹어야 할 사람이 저기 있는데’, 이런 마음이 우리 모두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리고 또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아주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구조대원들을 가로 막고 있는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와 논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일일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과 행위를 뒷받침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신의 이름으로 방관합니다. 제가 조금 과장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도 신을 믿고, 우리도 우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신을 믿는 행위를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하지요. 모두가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합니다. 모두가 신의 명령을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어느 순간 ‘눈을 뜨는 일’ 일텐데, 자기가 가진 신앙이 자신의 눈을 감게 만들어 버립니다. 참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면 장벽이 사라집니다. 신앙을 가지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이유는 “영혼이 눈을 떠서 내가 절대로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 보이고 가슴 속에 와 닿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묘미를 느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런 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처절한 죽음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에 매료된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은 쉽고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정말 잘 알 수 있고,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 얼마나 완고한지 모릅니다. 변화의 자리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도 스스로 이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한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오늘 말씀에 보면 지난 주 말씀을 상기해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클로에 일행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많은 문제가 교회에 발생하고 있다고 고합니다. 기억하시지요? 지난 주 말씀 속 이야기입니다. 문제 많은 교회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첫 번 째 ‘교회 안에 분쟁’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 오늘 3장에 이어집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읽어주십시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 나는 바울 편이다 » 하고, 또 다른 사람은 « 나는 아볼로 편이다 »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지적이 잘 들리시나요? 바울이든, 아볼로든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일 뿐입니다. 주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혼돈 가운데 빠져버립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 일부에게 바울이 주님이 되기도 하고, 아볼로가 주님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착각은 판단 착오를 일으킵니다.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인지 모르겠지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 어린 아기를 다루듯이 말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어린 아기가 거친 음식,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기에 젖을 먹이듯이 다루었습니다. 간곡하고 차분한 부탁입니다. ‘식물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분명히 알라’는 바울 사도의 당부의 말씀, 부탁의 말씀입니다.

-지금은 선택의 시간

부탁과 당부의 말씀은 또한 오늘 신명기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모세의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생활 아시지요? 그 세월 동안, 정말로 모나고, 거칠고, 어리석기만 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지도자는 모세라는 인물입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을 유언처럼 남겼습니다. 그게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그 중 오늘 말씀단락이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당부의 말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두 개의 길을 펼쳐놓았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생명과 번영의 길, 하나는 죽음과 파멸의 길입니다. 이것이 불 보듯 명약관화한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길을 선택할까요? 이렇게 쉬운 선택이 있나요? 하지만 선택은 늘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항상 옳지만은 않은 것이 인생이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Jean-Paul Sartre 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했답니다. 인생이란 Birth 탄생과 Death 죽음 사이 Choice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는 날 동안 얼마나 많은 선택을 했습니까? 오늘 무엇을 먹을까?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이것도 중요한 선택이지만 그것 보다 훨씬 중요한 선택들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혼 적령기의 청년들은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선택이겠지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정말로 큰 선택은 이 곳 프랑스로 옮겨오는 선택이 가장 큰 우리 모두 공통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잘 사는 길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선택의 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오늘 말씀에 잇대어서 말하자면, ‘잘 사는 길’, 잘 사는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잘 살고 싶으시죠?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 각자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다르게 생각을 품고 있을 수는 있지만 ‘잘 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일입니다.
잘 사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걸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격식 없이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즉답하기가 난처하다고 하시더라도 저는 여러분들이 그 답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 이미 선택하면서 살아오셨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것이 여러분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잘 사는 길이라 선택한 여러분의 선택에 흡족하신가요? 여러분이 선택한 길에 만족하시나요?

모세의 당부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16절 읽어보겠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서 하나님을 따랐을 때 주어질 운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생존하고 번성하며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겁니다.
17, 18절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망할 것이며, 가나안 땅에서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아 번성할 것이며, 불순종하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입니다. 당연하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뻔한 이야기로 들려서 흘려버리기가 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의 이 말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본래 그곳에 살던 토착민들과 영토 분쟁을 끊임없이 벌였습니다. 주변의 여러 제국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유대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으니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두 주장 사이의 적당한 위치에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중간쯤에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대다수 기독교인은 이 주장을 분리해서 받아들입니다. 실제의 인생살이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대처하고, 신앙생활은 교회의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그래서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럼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 믿으면 잘되니까 억지로라도 믿고 따르라”는 말로 듣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것들 -부, 재산, 자손의 축복, 세상에서 잘됨- 이것 보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의 평생 신앙생활이란 헛된 선택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은근슬쩍 하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을 마냥 좋은 것으로만 여기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생명됨, 정말로 여러분의 살아 있음, 생명 있음을 맘껏 발휘하는 것이 여러분께 하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여러분의 사람됨, 사람다움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됨, 생명으로 인해 살아있는 사람됨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놓아둔 채 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오늘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런 비효율적인 낭비의 사건 한 가운데서 벌어집니다. 세상적 계산과 손해의 시선으로 벌어진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포도원에 고용되어 아침부터 일을 한 사람과 늦은 시간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다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공정해 보이는 사건 속에 숨은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포도원지기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읽다가 정말 신비로운 장면을 만났습니다. 마 20:1,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하늘나라는 많은 포도가 생산되는 포도원 포도밭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 자신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이 마음, 이 생명됨, 이 사람됨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인생길에 많은 갈림길에서 여러분의 생명 됨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