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문 : 출애굽기 24:12-18, 베드로후서 1:16-21, 시편 2편, 마태복음 17:1-8
【마태복음 17:1-8】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사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 인생의 소중한 이 시간에 세상에서 헤매지 않고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의지하고자 주의 전에 나온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서로에게 인사 전하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투르키예와 시리아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5만 5천명이 넘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55,000 명이란 숫자는 사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샹젤리제 거리를 개선문부터 교회 앞까지 가득 채우면 그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번 지진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저지르는 착각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5만 5천 단위의 생명 묶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귀중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대체할 수 없는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빠입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수치화(숫자로 표현하는 것) 하여 이해하는 것은 때로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이 헛된 얘기가 아닙니다. 한 마리 양 때문에 찾아 나선 주님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질문들
오늘 설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설교 시간에 저는 이따금 여러분에게 질문을 내놓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 여러분에게 특별한 정답을 원해서 질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질문을 합니다.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뭔가 있겠지요? 그 이유는 여러분에게 ‘신앙적인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 오랫동안 듣고 알았던 말씀인 줄로만 알았는데’ 환기를 시키고 나면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보이는 법입니다.
이렇듯 아침에 일어나면 필요한 것은 창문부터 열고 환기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신앙적인 환기입니다. 환기를 하지 않으면 나쁜 냄새와 나쁜 기운이 내 주변을 가득 채웁니다. 오랫동안 환기시키지 않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목적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바가 있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아무리 신앙적인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가끔은 “저 혼자만의 한가로운 질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세상살이에 애를 씁니다. 사느라 바쁘시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분의 삶의 모습들을 제가 일일이 들여다보고 관찰하거나 진단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점은 여러분의 삶이 무척이나 바쁘고 세상에 시달려 보인다는 겁니다. 제 짐작이 맞나요? 틀린가요? 틀렸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시간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여러분이 신앙적인 환기를 돕기 위해서가 못되고 그저 한가로운 저만의 신앙적인 문제 제기로 끝나지 않을까 늘 고민스럽습니다.
-예수 이야기
여러분에게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설교자의 고민입니다. 그렇기에 또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전하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읽었습니다만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무엇을 말하려고 복음서가 있을까요? 복음서는 전부 다 목적이 있습니다. 쓰여진 목적이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복음서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복음서가 네 권이나 필요할까요?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인가요?
근데 무슨 이유에선가 4권의 복음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학자,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네 복음서가 담고 있는 핵심은 ‘예수 이야기’입니다. 네 복음서가 있는 이유는 각각의 신자 층에 따라서, 율법에 충실했던 유대교인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건,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를 알게 된 사람이건, 학식이 풍성했던 사람이건, 그저 낮은 계층의 사람이었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공동체에 적절하게 예수 이야기를 전하려고 쓰여진 것입니다. 이게 우리 앞에 놓여진 복음서입니다.
-예수 이해
그런데 예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는 것까지는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만,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문제는 “예수가 누구인지 서로 이해가 다르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역시도 같이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도 예수님을 다르게 이해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0년 전 처음 교회 공동체가 생겨났을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자 교회 안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놓고 사람들의 차이가 천양지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그나마 신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또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예수님 같이 높으신 분이 어떻게 우리와 같은 인간일수가 있나, 어떻게 저렇게 참혹한 십자가에 달릴 수 있나?”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눈을 속여서 유령처럼, 혼령처럼 나타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럴듯한가요?
초대 교회 당시에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존중하지만 실상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뛰어난 사람 중 하나, 둘째는 예수는 영적인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로 가져와 본다면 어떨까요? 우리들 가운데도 충분히 이와 비슷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석가와 공자와 마호메트와 함께 위대한 사람, 성인 중 한분이다.” 칼 야스퍼스라는 철학자가 처음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인류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서 그렇습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을 반대할 것은 없습니다만 죄송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17장 이해를 위한 16장
자, 이제 오늘 말씀입니다. 봉독한 마태복음 17장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참으로 많이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한 말씀입니다. 변화산에 올라선 예수님과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말씀에 따르면 산에 오른 후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입으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아무 생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이니까, 하나님 아들이시라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기하고, 신비한 일이 벌어지는 구나” 라고 받아들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은 마술사 같이 특별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구나’라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신비한 사건에는 배경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앞 장인 16장의 말씀을 알고 있어야 오늘 17장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앞 단락입니다.
16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대답은 다양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 등등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이 결정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이런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이 질문 잘 들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들어야 했던 질문이고, 초대 교회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고, 더 나아가 여기에 앉아계신 여러분 저와 모두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대답하는 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가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입니다. 여러분에게, 우리 각자에게 예수님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정답을 머리 속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대답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백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고백이 정말로 필요한 시간에 우리는 도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대답과 우리
우리에게 어떤 고백이 있나요? 우리의 고백이 너무 초라하고 빈약할까봐 조금 부끄럽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그저 선하고 좋은 일 많이 하신 분인가요? 나도 그분을 닮아서 착하게 살면 되나요? 아니면 좀 이기적이지만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마다 주시는 분이신가요? 평상시에는 굳이 필요 없지만 가끔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기도하면, 도와주시는 분인가요? 예수님은 내게 ‘곶감 항아리’ 같으신 분이 아니길 바랍니다. 곶감 항아리가 뭔지 아시지요? 가난한 시절 최고의 퀄리티를 가진 간식입니다. 맛난 것이 먹고 싶을 때 열어서 꺼내 먹을 수 있는 곶감 항아리 같은 분이 예수님이신가요?
이 질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베드로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16장 16절입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 대해서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참 복된 사람이구나.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태어나면서부터 그저 저절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태어난 아기가 어미젖을 찾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한 번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 주어져야 대답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물론 제 해석입니다. 사람은 육신으로 태어나지만 영적인 재탄생의 경험이 없으면 평생 동안을 육신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모든 일생을 다 허비하고 맙니다.
-17장은 말한다
오늘 17장의 말씀은 이런 고백 사건이 있은 뒤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을 이런 일이 있은 후 ‘엿새 후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가 산에 올랐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은 자명합니다. 오늘날 같이 여가나 캠핑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애를 써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도,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던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산은 일상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찾아가는 곳입니다. 일상적이 아닌 비일상적인 장소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산이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오르신 산을 ‘높은 산’이라 특정하고 있습니다. 해발고도의 높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장소가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의 시간에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둠이 순식간에 빛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잠겨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변화산에서 벌어진 사건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의 얼굴에 드러난 빛을 저는 태초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바로 그 태초의 빛이었습니다. 빛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까요?
신앙생활을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오늘 말씀으로 비춰보면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일컫는 말은 ‘변화’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죄인이 성인으로 바뀌고, 박해하던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으로 바뀌고, 높아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고 따라 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하늘이 주는 능력이기에 뭔가 하나님과 가까운 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감격하고 감동을 받아서 따라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말도 시간이 지나면 감동이 사그러들지요. 또 예수님을 정치지도자 권력을 차지하고 왕좌에 앉으실 분으로 이해한 제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 제자들의 고백들을 두고서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신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권세와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 하는 분도 아니고, 기적으로 놀라운 일을 보이는 분도 아니고, 권력 투쟁을 위해 오신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예루살렘은 왜 가십니까? 유대교라는 신앙 체계의 정점이 예루살렘입니다. 확고부동한 정치 체계가 있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들 민족의 경제적 중심인 거대한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돈과 종교와 정치가 모두 모이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인간들의 온갖 모순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도시 한 복판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나아가십니다.
왜 십자가를 지실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백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오늘 새롭게 다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이번 수요일은 성회수요일입니다.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구세주 주님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