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사순절 제 6 주, 종려주일 (2023년-14호)

제목 : 십자가 사건
본문 : 이사야 50:4-9a, 빌립보서 2:5-11, 시편 31:9-16, 마태복음 26:14-27:66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11-14】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총독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서로에게 따뜻한 주님의 인사를 전합시다. 인사 나눕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들의 갈등과 다툼으로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다툼은 다툼으로 끝나지 않고,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갈등은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집단으로 확대된 폭력으로 확대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파리 역시도 그렇고, 우리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은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차갑지만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날씨는 비가 왔다가 햇볕이 들었다가 오락가락이지만 이 가운데 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음을 느낍니다. 차가운 바람 속에 봄기운이 녹아있음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감히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주일은 일 년 52주일 가운데 1/52 주일, 단 한 번의 주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주일입니다. 오늘 주일로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간은 주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는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의 이 시간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아침으로 새롭게 시작됩니다. 마치 차가운 바람 속에 봄기운이 배어져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도 주님의 부활의 날에 새롭게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로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늘상 하는 말이라고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새사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와 함께 마태복음서의 한 단락을 오늘의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오늘 말씀을 위해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여정과 그 과정을 저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우리 성경의 4개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의 장면들은 참으로 인간적인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한 본문이기도 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모습들이 곳곳에 배어져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십자가 사건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주일 복음서로 정해져 있는 말씀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 거의 전부입니다. 너무나 긴 본문 속에 너무나 많은 장면과 묵상할 것이 너무나 많기에 전부 다 읽기에는 우리의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중에서 제가 선택한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11-14절의 짧은 단락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 고발당하신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아무런 해명이 없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긴 한 장면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8:28-38)에서 이 장면을 조금 더 확장시켜서 표현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빌라도는 이렇게 말을 되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제가 부사어를 하나 더 추가해서 이해해 보면, 빌라도의 말은 이렇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반문입니다.

-빌라도라는 사람

여러분 빌라도는 누구입니까? 빌라도는 로마의 정치인입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정치꾼입니다.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지 않으면 앉을 수 없는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치적인 모략과 술수가 동원되었겠습니까?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있으면 많은 것을 유대 사람들에게 뺏어 가질 수 있습니다. 합법적인 방법, 불법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유대 총독으로 있는 재임 기간 동안 최대한 식민지 백성 유대사람들의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로마 정치의 모략꾼’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 상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 진리’지요. 이 사람의 ‘인생 가치관입니다. 이 사람이 사는 세상, 이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강압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 안 됩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척, 백성들을 살피는 척해야 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정치술’입니다. 이런 빌라도 앞에 예수라는 갈릴리 청년이 끌려와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죽지 않기 위해 싹싹 빌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변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고 마태복음은 증언합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하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 청년 예수가 자신 앞에 서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말입니다.
이 장면만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일생을 떠올릴 때마다 ‘당당함’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갑이 든든해야 당당해진다는데, 예수님의 당당함은 그런 당당함이 아니겠지요. 든든한 검사 아빠 빽을 가진 오만한 당당함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세상 권력에 의해 주눅이 들지 않는 당당함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가치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입니다.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지닐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예수님의 당당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늘 궁금한 것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사람과 세상을 향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어지럽게 요동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에 비하면 예수님은 굳건한 태산과도 같으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비난에 속상해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요함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환영에 도취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당하고, 총독에게서 모욕을 받을 때도 예수님은 고요했습니다. 그 고요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염세주의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 이후에 부활은 정해져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그 고요함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풍파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영혼의 고요함을 잃을 때입니다. 염려가 우리 마음속을 파고들 때 우리는 허둥거리기 시작하고, 허둥대면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하든 한결같은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것은,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거워진 마음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사소한 일에도 상처입고, 속상해하고, 격분하는 자아를 자꾸만 비워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꾸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앞에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수난 앞에 서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요? 주님의 수난을 지켜만 보고, 구경만 하는 이로 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대단하시네, 그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을 다 견디셨으니 말이야” 하고 넘어가면 예수님의 수난하심을 반半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차력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다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이는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그분의 삶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길을 가시는데 옆에 도열하여 환영의 박수를 치고 찬양한다고 소리 지르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내게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해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깨닫는 순간 가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헨리크 시엔키예비치’라는 작가가 쓴 <쿠오바디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아주 유명하고 감동적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의 배경은 로마에서 박해가 거세어지고 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빠져 나가 도망치는 중입니다. 제가 한 단락을 읽어드리고 싶어 가져왔습니다.

《이튿날 새벽… 결국 베드로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남겨두고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산등성이로 태양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황금빛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고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산등성이를 따라 땅으로 내려오면서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드로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밝은 빛이 보이느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손에서 지팡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벌린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환희, 그리고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마치 누군가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사도는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늙은 사도가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나자리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베드로의 귀에는 온화하면서도 슬픈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내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사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대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나자리우스에게는 사도가 기절했거나 아니면 죽은 것 같이 보였다. 이윽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베드로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일곱 언덕이 우뚝 서 있는 로마를 향해 돌아섰다.》

-예수의 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져오는 평화는 원수들과 무기를 들고 싸워서 이김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라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사랑으로 부둥켜안아 미움을 녹임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과 나눔과 사랑이 아니고는 어떠한 평화도 불가능함을 꿰뚫어보십니다. 폭력에 짓눌려 익숙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런 예수의 입장은 비겁한 처신으로 보였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이,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이 역설적인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깨졌을 때, 기대는 환멸로 바뀌고, 환멸은 또 다시 폭력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세상의 폭력들을 보십시오. 폭력이 강한 힘처럼 보입니까? 오히려 폭력은 좌절감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자기에 대한 희망과 긍지를 잃은 사람일수록 폭력에 매혹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은 누가 보더라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 길을 택하셨을까요? 다른 길은 없었나요? 우리는 예수님이 마조히스트(masochist)가 아님을 압니다. 예수님도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가 훤히 보이는 그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는 ‘폭력과 미움의 고리를 끊는 길’은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는 인간의 야만성과 고귀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이를 향한 군중들의 조롱과 웃음소리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심연을 봅니다. 하지만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기도에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 일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일생을 살아서 이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부활의 길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고귀할 수 있는지를 온 몸으로 증언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폭력과 탐욕으로 찢어진 인류에게 연민으로, 함께 아파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임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셨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사건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덧없는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YES’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시고, 진리이고, 생명이심에 대한 확증입니다.
우리는 그 길로 초대 받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마음으로 세상의 악함을 이기십시오. 보잘 것 없고, 약해 보이는 것으로 이기는 법을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생명이 얼마나 존엄하고 고귀한 것인가를 삶으로 드러내십시오.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께서 인류를 향해 품으신 이 마음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봄날에 나귀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