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9일 부활주일 (2023년-15호)

제목 : 부활의 삶을 삽시다.
본문 : 사도행전 10:34-43, 골로새서 3:1-4, 시편 118:1-2, 14-24, 요한복음 20:1-18

【요한복음 20:1-18】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 여자여, 왜 우느냐? »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 마리아야! »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 라부니! »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부활의 인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두 다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오늘 우리의 서로를 향한 인사말은 2000년 교회의 전통에 따라 전해 내려오는 인사말로 나누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교회는 오랜 시간동안 부활의 아침을 맞을 때마다 이렇게 인사 나누었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부활을 축하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우리가 잠시나마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십자가 사건과 함께 우리 신앙의 기초 뼈대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기초가 없는 허상일 뿐이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되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보십시오. 힘과 능력, 세상 권세로서가 아니라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도 우리의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우리 가운데 혹시나 여전히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요?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누가 있을까요? 이태원에서 생떼 같은 자식을 잃고도 어느 누구에게 설명도 사과도 받지 못하고 여전히 피울음을 삼키고 있는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 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또 누가 있을까요?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누추한 복장으로 술병을 손에 든 채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거나 잠이 들어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누추함보다도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든 희망을 잃고 삶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보면, 지옥 입구에 이 “이 곳에 발을 들여 놓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고 되어 있다지 않습니까? 지옥이란 ‘희망 없음’입니다. 그들의 지하철 통로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오늘 부활의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아름다운 부활의 날을 맞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삶으로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누군가가 부활의 새 생명을 얻도록 돕고 힘쓰고 애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희망을 잃은 제자들

오늘 말씀 속 첫 장면은 이런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지요. 그저 시체가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는 인간적 관습에 따라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잇따라 온 예수님의 두 제자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인간적인 두려움으로 달려갔을 뿐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는 이름으로 보냈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신 목요일부터 부활절 새벽에 이르기까지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주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찾아온 감정, 마음은 무엇일까요? 무력감과 상실감, 그리고 깊은 당혹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어느 누구도 무력감, 상실감, 두려움을 경험해 보지 않으신 분은 단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무력감과 상실감은 좌절 때문에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좌절은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그 기대가 꺾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일을 반복했지만 자그마한 빛을 맘속에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희망의 작은 불빛입니다. 그렇지만 그 소망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한 인간적인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좌절과 허탈감, 그리고 이제 곧이어 자신들에게 가해질 권력의 폭력과 위협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십자가는 처형당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무덤 속에 갇혀 있었던 이는 어쩌면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인 첫 단락의 마지막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언뜻 언뜻 우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습니까?

-무덤은 비어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는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가 누워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습관에 따라, 관습에 따라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가 서성이고 있는 무덤가는 어디입니까?

무력한 신앙은 우리가 떠나야 할 무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한테는 무기력해서 라고 착각합니다. 무기력한 우리의 삶은 무기력한 하나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나의 무력감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갈급하지 않는 나의 삶의 방향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음으로 인한 인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자각이나 소소한 감사도 없이 한숨으로 날마다 불평과 남탓 속에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신자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살아있는 예수님과 만난 적도, 만날 생각도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남겨주신 말씀과 행적을 습관처럼 탐색만 할 뿐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 오늘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움의 세상에서 사랑을 선택하면서 “죽어도 죽지 않는다”, “희망과 사랑은 결코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절망처럼 불신앙적인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받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됨을 우리는 믿습니다. 무력한 신앙에서 떠나십시오.

-부활을 사십시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설명을 잘 하고 싶은데, 쉽지는 않습니다만 단순 명료하게 말하면, 이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주님이 하셨던 일을 나의 일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주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닐스의 모험”으로 유명한 ‘셀마 라게를뢰프’ 라는 스웨덴의 여성 작가가 쓴 “진홍 가슴새 이야기”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에는 부제가 자그맣게 달려 있는데, “여성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쓴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시선이 확 가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진홍가슴새도 지음 받았습니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몽땅 잿빛뿐인데 어째서 진홍가슴새인가요?” 이 작은 새의 물음에 하나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진홍가슴새로 불렀으니 너는 진홍 가슴새가 된 거란다. 하지만 네 마음가짐으로 너는 빨간 깃털을 받게 될 수도 있단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라는 말씀이 떠오르지요? ?온 몸이 온통 잿빛인 이 작은 새는 어떻게 빨간 깃털을 얻게 될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모든 일들은 옛날 옛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살아간 수많은 진홍가슴새들은 빨간 깃털을 갖고자 여러 방법들을 써보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체념하고 포기하기에 이른 그 즈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훌륭한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노래하고, 용기있게 힘쓰고 애쓰셨는데도 안 된 일을 우리가 무슨 수로 할 수 있겠니? 그러니까 너희들도 잿빛 깃털로 살아야 할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큰 성문이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아기 새들에게 어미 새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사람 세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는 중이란다.” “인간들은 어쩌면 저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머리에 뾰족한 가시관까지 씌웠구나.”
어미 진홍가슴새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미새는 가시관을 쓴 사람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비록 약하고 힘이 없는 작은 새지만, 엄청난 아픔을 당하는 저분을 위해 분명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거야.”
십자가 주변을 몇번 빙빙 맴돌던 작은 새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 분의 이마에 박힌 수많은 가시 중의 하나를 자기 입으로 뽑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의 피 한방울이 작은 새의 가슴에 뿌려졌습니다.
십자가의 달려계신 그 분은 고통 중에서 작은 새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너희 조상이 세상 첫 날부터 그토록 구하려고 애쓴 것을 네가 드디어 얻게 되었구나. 내가 당하는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그 마음으로 말이다.”
지워지지 않고 씻겨지지 않는 주님의 피. 네 마음가짐으로 빨간 깃털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아파했던, 수많은 가시 중에 하나라도 빼내어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자 했던 그 마음이 붉게 물들어 어미새 뿐만 아니라 아기새들에게도 빨간 깃털이 생겼습니다.》

이 동화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연민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결국 자기의 이름값을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내가 되고’, 우리가 ‘우리가 되는 것’, 우리의 사람됨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과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과연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모습인지 돌아봅시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참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엄숙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합니다. 우선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자극하는 즉각적인 감정에만 휘둘리지 말고, 차분히 앉아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굴레를 벗겨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와 같은 굴레에서 단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바라보고 살펴본다면, 굶주림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밥 한 숟가락을 덜어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한 방울을 더 흘리고, 차별당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정당한 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학대받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 이것이 부활을 믿는 이들이 택해야 할 삶의 길입니다. 가장 소중한 부활의 생명은 우리들의 단단한 헌신을 통해 현실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절에,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성도답게 살겠다는 진홍색 꿈이 아로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열기 위한 일에 봉헌할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