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 당신들의 하나님
본문 : 신명기 10장 12-20절
«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땅과 땅 위의 모든 것이 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직 당신들의 조상에게만 마음을 쏟아 사랑하셨으며, 많은 백성 가운데서도 그들의 자손인 당신들만을 오늘 이처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고,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당신들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섬기며,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십시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일, 성령강림 후 5주일 예배 말씀의 시간입니다. 서로 인사를 전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프랑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부 도시와 지역에서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폭력이 난무합니다. 프랑스 경찰의 만성적인 인종 차별적인 태도와 함께 이걸 기회로 삼아 상점을 약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증오와 폭력도 불사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이 벌어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
7월 첫 주일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인간 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참혹한 일은 사람이 벌이는 일입니다. 17세 소년에게 총을 쏠 수 있는 존재도 사람이고,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점들을 부수고 들어가 물건을 훔쳐가는 이런 일을 하는 존재도 사람입니다. 소포클레스가 인간을 ‘이상한’ 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그리스어 ‘이상한’이라는 단어, ‘데이논(deinon)’은 이상하다는 뜻 외에도 ‘무섭다’, ‘경이롭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인간은 경이롭기도 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인 여러분은 지금 누구십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 자신을 문제로 인식했기에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내가 아닌 타자의 존재는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타자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간됨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밖에서 내게 다가오시는 타자이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우리는 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 지, 점검해 보는 차원에서 오늘 말씀의 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오늘 말씀 신명기는 거의 전부가 모세의 설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상황은 이렇습니다. 히브리 민족에게 이집트를 탈출하는 여정이 참으로 길고 길었습니다. 이 길고긴 여정 끝에 와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마침내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요단강 동편, 여리고 맞은편인 모압 골짜기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상세하게 일러줍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이제 요단강을 곧 건너가게 될 터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외부의 세력과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지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의 모든 길을 따르라’, ‘그를 사랑하라’, ‘정성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참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즉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끌어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분명합니다. 그래도 다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자, 말씀 속 이 자리에서 모세의 설교를 듣는 이들과 여기 모인 우리가 시간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같은 지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명령을 듣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일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고 간명하게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각각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뜻,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값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걸 알 때 삶은 정성스러워지고 정갈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할 수도 없고, 좋은 곳을 여행을 시켜드릴 수도 없고, 선물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좀 공허합니다. 말로만 ‘찬양한다, 사랑한다,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면 공허한 헛말이 되고 맙니다.
단순합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했던 세상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들,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였던 초대교회 공동체, 요한공동체의 말씀인 요한1서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1 4:20)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제가 요즘 공항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차량으로 픽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다른 나라에서 프랑스로 들어오는 어떤 손님이 자기 14살 먹은 아들이 아프니 약을 사달라고 미리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 때 제 마음에 든 첫 번째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순간 알았습니다. 저의 못되고 오래된 버릇이 또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나오는가 하면 ‘내가 차 운전, 픽업하는 사람이지, 약 사다주는 심부름꾼이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외국에 나와서, 아무데도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텐데, 저의 못나고 오래된 습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가 뭔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듯한 그럴싸한 생각들을 제가 지어내고 있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을 제가 낚아챘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내가 내 마음을 아는 순간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일일까요? 공허하고 무가치한 말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말은 하지만 그 길에 실제로 들어서는 일에 코웃음 치거나, 가벼이 여긴다면 그의 말은 의미 없는 선언일 뿐입니다.
-마음의 할례
모세는 말합니다. 이렇게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가 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시지요? 그런데 마음의 할례란 무엇일까요? 에스겔 36장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36:26). 우리의 마음이 돌같이 굳은 마음이라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기뻐할 줄 모르는 마음입니다. 기쁨이 왜 없는 줄 아십니까?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내가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는 한, 감사도 기쁨도 사라지고, 내 요구만 커집니다. 이웃들의 아픔도 함께 나눌 일은 고사하고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마음의 할례는 스스로 행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마음의 할례를 청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로 내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청해야 합니다.
-거짓 신들에 휩싸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신들입니다. 모세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습니다. 모세의 이 주장을 우리 시대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일으키는 문제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스스로 신이라 하지 않지만 사람들을 내적으로 지배하는 거짓 신, 가짜 하나님입니다. 혹은 유사(類似) 신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는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우상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당신의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놓고 보면 왠지 찔끔하게 됩니다. 내가 제일 앞에 두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돈, 권력, 쾌락, 사람관계, 좌우익 이데올로기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주대한 시험 세 가지 기억하시지요? 어쩌면 인류는 이 시험을 인류가 지속하는 한 계속 마주대하게 될 것입니다. 빵, 물질(돈)이라는 우상 앞에서 망설이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주님, 하나님인가’ 하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돈이라는 가치로 환원시켜 버리는 세상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여러분, 우상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고, 우리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요즘 “악귀”라는 드라마가 있더군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악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귀란 누군가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커나간다.” 맞는 말입니다.
-구별의 시작
오늘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을 구별해야 합니다. 두렵고 끔찍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인 것처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가짜 하나님을 도려내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짜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축복이라는 달콤한 말로 잘 포장해서 우리 앞에 내놓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와 거짓을 구별하기가 힘듭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쌓고, 더 많이 차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믿은 결과 이웃과의 관계는 망가졌습니다. 옆의 사람은 적대의 대상, 경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온 지구는 쓰레기장이 되었고, 교회조차도 온통 탐욕의 거래가 난무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그네임을 기억하라
“나그네임을 기억하라”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지구라는 별을 선물로 받은 나그네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제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껴서 사용하다가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원래의 형태와 본래의 성질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갖다 버리면 지구가 4개가 필요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자원을 사용하면 몇 년 안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지구 평균 온도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올 여름,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지구촌 곳곳에는 이상 고온으로 힘들어합니다. 캐나다에서 난 산불은 한반도 면적보다 더 큰 면적을 태웠습니다. 이미 50도 가까이 기온이 오른 곳도 있습니다. 한국 땅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다에는 저기 먼 열대바다의 물고기들이 찾아와 살고 있습니다. 비가 한번 오면 폭우로 변해버립니다. 창세기 6장-9장에는 노아의 홍수 장면이 등장합니다.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한 구절 읽어드릴께요.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창 6:5-7a)
이 말씀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맺음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시려는 일을 기꺼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인간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함으로 사람다워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 화난 사람, 억눌린 사람, 엇나간 사람, 배고픈 사람 등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는 일은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살 때 신앙은 비로소 나에게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삐뚤렁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들의 하나님으로 끝날수도 있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즈음에, 어수선한 세상 한 가운데서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겸손함으로 따뜻함으로 그리고 용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