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9일 성령강림 후 제6주 (2023년-28호)

제목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
본문 : 베드로후서 1:3-8, 2:17-2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허무맹랑하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종한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기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속담이 그들에게 사실로 들어맞았습니다. «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 그리고 «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

-인사합시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서로에게 반가운 마음, 서로를 환대하는 마음으로 인사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며칠 날씨가 제법 서늘해서 “가을인가?” 하고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만 하지만 우리는 어김없이 한 여름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어김이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앞에서

오늘 우리는 ‘베드로후서’라는 말씀 앞에 서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는 기본적으로 편지글입니다. 편지는 보내는 이가 있고, 받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는 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네 권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편지의 형식의 글입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바울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의 손이 미치지 못한 많은 지역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 중에서도 에게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도자였습니다.
이와 다르게 오늘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바울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소아시아 북부 지역 흑해 지역에 베드로가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곳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그저 사람이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곳에 예수를 구주로 삼고 믿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50년 전에 미국과 유럽의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아시아 동쪽 끝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입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과연 의미 있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들을 돌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지요.

1900년,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에 전 뉴욕 카네기홀에서 미국 ‘기독교 해외 선교대회’가 열렸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올리버 에비슨’이 단상에 올라 저 멀리 조선이란 땅에 사는 민중들을 위해 현대식 병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연설을 듣고 있던 클리블랜드 장로교회의 한 장로가 깊이 감명을 받아 거금 1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분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여기 앉아계신 우리 모두가 이 분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세브란스’입니다. 이분이 기부한 돈을 통해 조선 땅에 현대식 병원이 세워집니다. 은혜 받은 한 사람의 마음이 이룬 결과를 보면,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구상 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속에 우리가 삽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그리스도의 교회가 소아시아와 유럽 지역에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의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신약성경 대부분의 편지는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 해결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사사로운 교인들 간의 갈등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신학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온갖 문제로 휩싸였습니다.

-베드로의 당부

이미 나이가 지긋하게 먹어서 마지막이 가까운 베드로가 공동체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많이 있겠습니다만 그가 인사와 더불어 내놓는 말씀은 이 말을 내놓습니다.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누리는 생명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과 생명 주심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사람의 성정이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어떤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 더운 여름날, 교회의 이름으로 모여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마음이 평안하길 원합니까? 좋습니다. 육체의 건강, 물질적 풍요도 괜찮습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라면 신앙이 아니라도 거기에 접근하는 길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하기에 따라서 굉장히 난해한 표현일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말을 보시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1:4)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정욕으로 부패하는 사람’입니다.

정욕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삶을 이끌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껏 가꾸고 또한 먹이를 주는 것이 내 삶에, 내 마음에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덕목

베드로는 성도들이 열심을 다해 몸과 마음에 익혀야 할 덕목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기본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에는 덕을 더해야 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해야 하고, 지식에는 절제를 더해야 하고, 절제에는 인내를 더해야 하고, 인내에는 경건을 더해야 하고, 경건에는 신도간의 우애를 더해야 하고, 신도 간의 우애에는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1:5-7). 추상적인 단어들이 열거되니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덕스럽지 못한 믿음은 교만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은 있지만 덕스럽지 못할 수도 있나요? 있지요. 많이 봅니다. 특히나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 사이에 많이 보이면 참으로 덕스럽지 못합니다.
또 바른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덕은 방종에 이릅니다. 방종이란 제멋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도 늘 점검의 차원이 필요합니다. 바른 이해에서 벗어나면 신앙도 사람들을 해치는 무기가 됩니다.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덕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또, 삼가는 태도를 알지 못하는 지식은 오만합니다. 지식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세상에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란 없습니다. 그러니 삼갈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인내를 모르는 절제는 조급증과 원망을 낳습니다. 인내에도 경건함이 없으면 권태로워집니다. 신도간의 우애가 없는 경건은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신도간의 우애는 있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이 없다면 불화에 이르기 쉽습니다.

-예수 믿기

이렇게 말하면 일상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그런 목표가 과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됩니다. 첫째, 아직 우리는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된 연수와 우리 믿음의 깊이와 꼭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합니다. 상대를 도구화하지 않습니다. 이용해 먹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머리 속에 온갖 교리적인 설명이 떠오르신다면 그런 대답은 우선 내려놓으십시오. 누군가에게 입력된 것도,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 근원적인 대답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내가 예수를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분이 좋아하시는 일을 나 또한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 기쁨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삶이 끌려간다면 다시 한번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기뻐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니까’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돼!”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을 옳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온갖 탐욕을 부리고, 그것으로 이득을 취하는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한번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 사람들이 안고 있는 아픔들을 예수 당신의 일로 받아들이시고 끌어안으셨습니다. 그 당시 견고한 유대교가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주셨고,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섰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습이자 내용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받아들이셨기에 그렇게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요? 예수 믿는 우리는 바로 이런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일도 해야 하고, 가정도 돌봐야 하니, 능동적으로 그런 이들을 애써 찾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어떤 계기에서든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밥벌어 먹는 일이든지, 신앙의 일이든지, 내게 다가온 사람이든지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진실함은 특정한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종교적 행동에 참여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정성스럽게 사는 데서 드러납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이익과 손해를 셈하는 마음으로만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 영혼은 누추해집니다.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인이란 ‘자기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기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있습니다.”(벧후 2:19a)

거짓 지도자들은 탐욕스럽고,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여 자기들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사도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물 없는 샘’, ‘폭풍에 밀려 가는 안개’라 말합니다. 물이 솟구치지 않는 샘은 황량합니다. 고인 물은 썩고, 온갖 더러움이 그 속에 쌓입니다. 물이 솟구치지 않는 것은 지하수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황폐하게 변합니다.

-형편이 더 나빠진 사람들

신앙생활에 높고 낮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서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킴입니다. 어긋날 길로 가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돌아서서 다시 목표를 향해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걸어온 그 거리가 아까워 돌아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자기가 한 결정을 정당화 하다 보면 오히려 그 결정에 스스로 확고하게 매이게 되는 일,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해보면, 영혼이 굳는 현상입니다. 돌이킬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병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돌아서면, 바로 거기에 구원의 문이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온 인류를 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숨결이 우리 속에 깃들 때,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 순간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의 기억은 사라지고 권태롭고 무거운 일상만 남습니다. 힘든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관계의 어려움은 여전하고,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옛 삶이 슬그머니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마음을 붙들어 자꾸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병들거나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사도는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말려들어 죄의 유혹에 굴복하면, 그런 이들의 형편은 더 나빠진다고 말합니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차라리

흉악한 범죄자나 인간 실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볼 때면 우리 마음에도 이런 말이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사도는 의의 길을 알고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리는 이들은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차라리’라는 단어가 참 가슴 아프게 들려옵니다. 생각나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길에 접어들었다가 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며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에는 아쉽지만 그 정확한 정황이 나오지 않지만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이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우리는 잘 압니다.

기독교, 기독교 교회, 기독교 신앙에 가장 치명적인 적은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길을 걷지 않는 이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스스로 잘 안다고 믿기에 다른 이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지도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말씀 맺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목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 없는 샘이나 폭풍에 떠밀리는 안개는 허망합니다. 우리 속에서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기를 빕니다. 이 냉랭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