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
본문 : 요한2서 1:4-9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새 계명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을 써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삼가서, 우리가 수고하여 맺은 열매를 잃지 말고,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에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상살이의 시름 주 앞에 내려놓고 주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어제 결혼식을 올리고 새롭게 부부로 태어난 박소영, 엘루아 두 분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삶에 함께 하시고 귀한 아름다운 생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발견하는 두 분 되시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합시다. 반갑습니다.
-요한2서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 말씀은 요한2서입니다. ‘요한2서’ 성경말씀을 딱 펼쳐놓고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2서는 1장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는 오바댜서, 빌레몬서, 요한3서, 유다서, 그리고 오늘 요한2서는 성경본문이 1장 밖에 없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13절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얕볼 수는 없겠지요. 그 의미가 작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모두 끝난 후에 이 땅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소규모의 작은 지역 공동체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소아시아와 유럽과 흑해 연안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공동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 공동체’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남겼다고 해서 더 좋은 공동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공동체가 그 스승 예수를 따르기에 바르고 열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많고, 돈이 많은 교회가 좋은 공동체가 아니라 얼마나 예수 따르기에 열심인가가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예전에 ‘에베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에베소는 철학과 문화와 예술의 고대도시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아데미의 신전과 극장’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라고 알려진 ‘켈수스 도서관’이 있는 곳입니다. 제가 에베소에 갔을 때 관광 안내도에 따라 이런 유적들을 구경했습니다만 사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곳은 사실 ‘성 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후에 하나의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이, 사도 요한,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장소가 바로 에베소였기 때문에 그 기념교회를 꼭 방문해 보고 싶었던 기분 좋은 추억이 제게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이룬 공동체는 그들만의 특별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이 배운 복음 가운데 가장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남긴 요한복음 3:16에 잘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 더 소개하면, 요한1서 4장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발견하셨지요? 요한이 이룬 초대 교회 공동체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랑의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자 부르심입니다.
-요한2서가 전하는 감동
아시다시피 요한2서는 편지입니다. 편지의 저자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어른의 위치에 있는 이가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2서가 주는 감동을 새기기 위해서는 먼저 4절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4절)
헬라어 성서에는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내가 발견한 것을…”이라고 본문이 시작됩니다.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보아서” 내가 발견한 것이 있어서, 내가 본 것이 있어서 심히 기뻤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무심코, 때론 의미 없이 지나쳐 왔던 것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내게 의미로 다가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보니, 내가 보고나서’라는 말씀은 우리 귀에 친숙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는 헬라어 단어가 있나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있습니다. 그가 풀지 못한 난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물체의 부피를 재는 일이었습니다. 고민 중에 있다가 어느 날 목욕을 하고자 욕조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 몸 부피만큼 욕조 물이 넘쳐나는 것을 본 순간, 고심하던 문제가 풀리는 원리를 찾았다고 외친 소리가 있습니다. 목욕탕을 뛰쳐나오면서 그가 외친 말은 “유레카”입니다. 오늘 말씀 4절에 ‘유레카’가 나옵니다.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보았다고, 무엇을 찾았다고 소리칩니까? 진리 안에서 걷는 자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공동체의 어려움
진리 안에서 걷는 이들을 보는 일이 왜 이토록 기쁜 일이 될까요? 교회 안팎이 혼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에 ‘초대교회’를 떠올리면 뭔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뭔가 우리 보다 순수하고, 우리 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상상합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초대교회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교회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문제는 참으로 다양해보이지만 몇몇 중요한 키가 있습니다. ‘권력과 돈’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주제를 보면 권력과 돈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권력과 돈으로 귀결됩니다. 여러분, 이것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가 안고 있던 문제는 오늘날처럼 세속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 7절에 그 문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던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부정”입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던 여러 지역 중 많은 지역이 헬라 철학이 지배하던 곳들입니다. 헬라철학의 기본은 영적인 것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적인 것은 유한하고 변화가 많은 것,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고귀한 분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는 가짜다, 환영, 유령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한2서를 쓰게 된 동기입니다.
오늘날 바르게 믿는 사람이 드문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교회마다 높은 첨탑과 비싼 건축재로 지은 멋진 예배당은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들 중에 바르게 믿는 사람이 많을까요? 바르게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심각하고 철학적인 주제 의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르게 믿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바르게 믿고 있는 지 말입니다.
지난 주간 한국에 비가 많이 와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충북 오송 지하차도에 갑자기 물이 들어차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사가 벌어졌을 때 화물차를 운행하던 ‘유병조’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물이 들이차서 이 분의 화물차도 시동이 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려고 화물차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마침 급류에 떠내려가던 3명의 시민을 붙잡아서 차 지붕 위로 끌어올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중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이 일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이 떨어졌습니다. (어쩌면 이제 삶의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화물차 기사 분에게 ”이제 이 손을 놓으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화물차 기사 분이 손을 놓았을까요? 손을 놓고 떠내려가도 놔두었을까요? 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서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은 이 여성의 부모가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딸을 끌어올려준 기사 분에게 손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 마음에 우리 주님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손을 놓아달라고 말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세상살이가 버거우니, 여러 사정이 있으니, 이러 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주님, 나는 안되는 사람이예요.” 손을 놓아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잡은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도 이분을 닮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일을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우리가 바르게 믿는가?”였습니다. 바르게 믿는다는 게 뭐지?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고 심오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참여하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도모하며 사는가?”입니다.
-자매여, 자녀들이여
요한2서는 말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요한2서는 특이하게도 교회를 가리켜 “자매” 라고 부르고,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교회 eglise, 에클레시아는 여성형입니다. 교회가 가진 특별한 여성성을 드러냅니다. 교회의 모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여성성을 강조하여 표현할 때 그 깊이가 더욱 깊어집니다. 어머니 교회라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서로 사랑하자”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있었나요? 우리가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처음부터는 언제일까요? 여기서 처음(아르케)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태초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래 나면서부터 타고 난 것이 있는데, 인간은 “사랑의 존재”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드신 이가 “사랑의 거룩한 존재”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유레카”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닮고, 사랑을 누리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하고 흉측한 일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 며칠 계속 보도되고 있는 뉴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후에 이 교사에게 가해졌던 부모들의 언어폭력과 협박에 가까운 말들이 알려지는 것을 보면, 감히 입에 담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보면, 부모가 자기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벌인 일들입니다. 자식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교사에게 이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흉악한 살인범들이 말 한 것 중에 이렇게 말한 것도 있습니다. “사랑해서 죽였다.” 오염된 사랑의 세상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 “서로 사랑하자”는 말에는 ‘아가페(아가파오)’가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아가페는 이성간의,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친구 사이의 우정을 말하는 단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자는 요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마저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처음부터 갖고 있던 그 사랑이 지금 어디에 있냐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하는 삶을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도 주님처럼 사랑의 존재가 되십시오.
정호승 시인의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를 마지막으로 드립니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정호승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는 어찌되었든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