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
본문 : 예레미야 9장 23-24절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한 소망합니다.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소영 자매의 Limoges에서의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장시간 버스와 기차로 이동하느라 몸은 피곤하지만 소영 자매와 엘루아 형제에게 축하도 건네고, 또 축사를 통해서 그들을 축복하고 나니 마음이 뭉클하기도 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귀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라고, 여러분들도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청년들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을 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시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상태에 있다가 우리가 성장하고 또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면 더욱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요즘 우리 세상
오늘 말씀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요즘 하는 일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제법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분들이 차에 올라타서는 같은 질문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주로 파리의 치안 상태에 대해 염려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얼마 전 있었던 시위와 함께 이어서 벌어진 상점 약탈 사건들에 대해 걱정이 되어서 파리 시내를 편하게 돌아다녀도 안전한 지 문의를 많이 합니다. 게다가 덧붙여서 파리에서 왜 이렇게 자주 폭력시위가 벌어지는가? 다소 어려운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 속에 문득 최근에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한 20대 청년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흉기를 휘둘러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경찰에 붙잡히고 나서 한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모두 죽이고 싶었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다”라고 말한 것이 왠지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가 저지른 범죄와는 별개로 이 사람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가 생의 모든 희망?, 자신에 대한 가능성?, 의지? 자신의 인생을 앞으로 밀고 나갈 힘을 잃고 이런 일로 인생을 끝내려 시도했던 모습이 어쩌면 폭력적인 도둑질과 강도질로 모든 일이 귀결되고 마는 이 땅의 젊은이들과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믿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고 여겨지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혐오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참 싫고 상대하기 싫다가도 엄마 손 붙들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사람이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농토에 뿌려지는 씨앗이 모두가 발아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잎으로 대지를 뚫고 나오는 아름다운 생명력을 발휘하는 씨앗도 있지만 한편 썩어서 잎을 내보지도 못한 채 죽어버리는 씨앗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의 힘과 능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잘 발휘하여 귀한 열매를 가득 거두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하등 남에게 피해만 입히는 인생도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면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 선한 존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태’라고 철학에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지 못합니다. 작은 씨앗이 실제로 나무로 성장하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은 것은 ‘현실태’ 입니다. 우리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이라는 장(場)
그렇다면 왜 사람은 자신을 잘 발휘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거나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까요? 어려운 말들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참으로 달콤한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당연히 그 미래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약속을 믿고 홍해라는 장애물도 이겨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광야’입니다. 광야의 모래바람 마실 물과 먹을 것을 구할 수조차 없는 광야와 함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절망감과 좌절, 분노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나라면, 우리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평상시 우리의 모습을 잘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앞길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음과 고통소리를 듣고 그들 곁에 직접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난리가 나도 날법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따질만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는 백성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합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하나님의 사랑법
그러나 광야가 그들에게 있어야 함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광야라는 인생의 장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곳에서 단련되지 않고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인생이라는 장을 통해서 성숙해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시련 없이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 없이 성숙해지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우리의 어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어려움과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비교하여서 그들의 고통이 더하니 우리는 견딜만하다, 참을만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닌 줄 잘 아시지요? 그들의 고통의 아픔만큼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능태’에서 끝낼 것인가, 아니면 ‘현실태’로 우리를 만들 것인가? 우리의 신앙적이고 인간적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라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저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서 중에서 예레미야서를 가장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좋아하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아픔에 동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예민한 감성으로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마을을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힘이 빠지면 바위는 굴러서 마을을 덮칠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죽을 것입니다. 유대 나라가 망하기 직전 눈앞에 뻔히 보이는 멸망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거대한 바위를 막고 서있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의 외침은 절절하고, 고통과 울분에 차 있고, 백성들에 대한 연민에 민감한 말씀들입니다.
-자랑하지 말라
예레미야의 외침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나라의 멸망을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했던 예레미야는 넘어지는 담을 받치려는 절박함으로 백성들에게 주님께로 돌이키자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예민한 감성으로 분별해내고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십시오. ‘그냥 자랑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인생살이에 있어서 겸손한 것이 좋지 않겠냐”는 차분한 권면이나 충고가 아닌 것을 여러분은 느끼셔야 합니다. 요즘 마트에만 가도 휴가용 책들이 놓여있습니다. 가벼운 퀴즈나 그림 맞추기, 숫자 게임 등, 가볍게 휴가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놓여 있더군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사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입니다. 꼭 해야 할 의무 사항이 아니지요. 휴가지에서 시간 보내기용으로 보는 것들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인생의 가벼운 충고가 결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추고 있는 것,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자에게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용사는 힘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말을 뒤집어 보면 이렇습니다. 지혜자에게 지혜가 없으면 지혜자가 아닙니다. 용사에게 힘이 없으면 그가 용사인가요? 아닙니다. 재산이 없으면 부자라는 말도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 ‘힘’, ‘재산’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주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으로 예레미야 시대가 여러분 생각 속에 상기되었으면, 떠올랐으면 하고 바랍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유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떨까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은 더욱 움켜쥐고, 자기가 지닌 확신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에이,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하실 리가 없어!” 하고 말입니다. 온갖 지혜를 동원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가진 힘을 확인할 것입니다. 재산도 이런 상황에 유용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마음속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은 이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보인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불행이 엄습하는 것을 느낄 때 그들이 움켜잡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지혜, 힘, 재산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들이 붙들어야 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몇 순위 쯤 될까요? 당장 눈앞의 현실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재산이지요, 자신의 지혜를 발휘하여 살아남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힘이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유대 백성의 삶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입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기
오늘 우리에게 깊숙이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은 몇 순위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라고 고백도 우리는 수시로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삶에 하나님은 몇 순위입니까? 순위표 안에는 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다니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생각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긍휼함입니다. 공평입니다. 그리고 공의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모습입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창자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법, 우리가 닮기를 원하는 모습은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으로 보는 것입니다. 몸으로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친절함 혹은 관대함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흠까지 품어 안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빚쟁이여서가 아니라 그 사랑에 감복하여 그 사랑을 닮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부족해도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 속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 머리 속으로 모두 다 완벽히 이해한 다음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최근에 책 속에서 발견한 제가 감동을 받은 이야기 하나를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치는 말
1993년에 개봉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아십니까?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도 ‘브래드 피트’라는 잘 생긴 배우와 멋진 ‘플라잉 낚시’ 하면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엄격한 장로교 목사와 그 두 아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학교생활에 성실하여서 나중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둘째는 자유분방한 기질로 살면서 기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질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슬립니다. 기자인 이 아들은 중요한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다가 폭행을 당하여 살해됩니다. 형은 동생이 잘못된 길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의 죽음에 몹시 힘들어합니다. 죽은 이유를 알고 있는 큰 아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지를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 확 띄는 모습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는 목사이기에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단 위에 섰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아버지가 이런 자신의 비극을 헤쳐 나가는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자식의 처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이 영화의 원 제목이 “A river run through it”입니다. “하나의 강은 그것을 통해 흐른다.” 강은 우리의 인생일 것입니다. 이 강이 ‘그것’을 통해 흐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각자 짐작해 보십시오. 인생이라는 거대한 강을 흐르자니 얼마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이 발생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해도 살아갑니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완전히 받아들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또한 그렇기에 우리도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때론 이해할 수 없어도, 때론 알 수가 없고,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믿음과 행동이 우리의 삶에 잔잔히 퍼져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