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9절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 주님, 누구십니까? » 하고 물으니,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인사 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서로 인사 나누고 오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고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누가-행전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말씀은 사도행전 가운데 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에 전제가 되는 사전지식이 조금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입니다만, 여러분 혹시 ‘누가-행전’이라는 말 들어 보셨는지요? 처음인가요? 이 단어는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만든 말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쳐서 부르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쌍둥이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같을까요?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행전, 사도행전은 바울행전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누가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중심인물은 여러 많은 사도라기보다는 바울입니다. 이 바울을 유대식으로 이름하면 ‘사울’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이 오늘 말씀에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사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알기로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예수에게 붙들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사울’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7장 58절에 보면) 스데반이라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를 유대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적어도 사울은 돌팔매질을 직접 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동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8장 1절)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8장 3절에는) 사울은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서 예수 믿는 이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넘겼습니다. (9장 1절에서 보면)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살기를 띠고 있습니다. 사울의 상태가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감옥에 쳐 넣거나 죽이는 일에 처음에는 마음으로만 동조하는 사람이었다가 그 마음이 점점 커져 갑니다. 살기를 띠게 되고, 나중에는 직접 그 일에 동참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찾아다닙니다. 이 사람이 사울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을 보면 굉장히 난폭하고 깡패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거리의 불량배가 아닙니다. 사울을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은, 사울이 이렇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진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배경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 사울입니다. 그 중에서 율법에 충실하기로 유명했던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학업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듯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학자의 수하에 들어가 율법을 배웠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조기 유학생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태생부터 로마 시민권에 따르는 특전을 누려왔습니다. 좋은 가문, 좋은 선생 밑에서 잘 배워서 유대 율법의 대학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강남 8학군에, 서울법대, 미국 시민권자? 그리고 고시합격까지 된 사람. 그 정도의 레벨을 갖춘 사람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의 인생이 운이 좋은 편입니다. 좋은 환경, 가정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객관적인 조건과 환경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끝 날까지 좋게 끌고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그의 인생이 판가름 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시점이 오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폭, 깊이, 높이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것이 이런 주변 배경, 여건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인생에 다른 터닝 포인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길을 나서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를 향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울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사회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는 이 당시 유대땅 밖의 지역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던 도시입니다. 사울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식인가 하면, 예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를 믿는 이들이 다마스쿠스에 너무나 많다는 소식, 그러니까 자신의 동포인 사람들이 이 예수라는 이를 믿는 신앙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신앙의 배신자, 배교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 민족의 신앙을 배신하고 다른 신앙을 갖게 된 그런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오고자 사울은 길을 떠났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사울은 머리만 학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 가슴도 자신의 신앙으로 뜨거웠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적인 열정은 살기를 띠고 있습니다. 사울의 길이 올바른 길일까요? 사울은 주님 제자들에 대해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서 대제사장에게까지 찾아갑니다. 그리고 공문을 요청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올 수 있는 공식서류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도를 믿는 사람.” 이 말만 들으면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서울 시내를 걷다보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인상이 참 좋다, 조상 덕이 있다…” 등등. 결국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서 자기 종교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번역했지만, 다른 번역본이나 원어에는 “그 길에 있는 사람, 그 길을 따르는 사람, suivre cette Voie”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그 길은 예수가 걸었던 길입니다. 예수 그 길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잡으러 가기 위해 사울 역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서 있는 길은 ‘자기 의’를 펼치러 나선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신앙인들이 사울과 비슷한 길을 걸어갑니다. 익숙한 길이지요. 그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확인’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남들 보기에 신앙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는 지 확인합니다. 자기의의 실현이 바로 사울의 정체성입니다.
-길이 끊어지다.
그런데 그렇게 오가던 익숙한 길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선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길이 끊긴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울은 갑자기 길을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9:3-4a)
갑자기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autour de lui). 빛이 둘러 비추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요? 빛이 마치 울타리처럼 사울을 둘러싸서 사울이 그 빛 안에 갇힌 모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사울은 땅에 넘어졌습니다. 엎어져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걸어왔던 그 길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 길이 너무나 낯선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 꼭 이와 같지 않은가요? 저는 진짜 신앙생활은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신앙은 어제도, 그제도 하던 신앙의 행위를 그냥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쉽고, 익숙하고, 편하고, 안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반대로 우리를 낯선 길로 끌어들이십니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낯설게 여겨집니다. 따뜻했던 것들도 불현 듯 차갑게 여겨지기도 하고, 익숙했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았는데, 우리는 어느새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 도달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냥 땅으로 엎어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길 사이에 사울은 갇혀버린 것입니다. 사울도 얼마나 이 일이 충격적이었는지, 갈라디아서, 고린도서에서 4번이나 이 때의 일을 회상합니다. 사울은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입니다. 성경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머리의 종교에 머물던 사울이 그의 마음에 주님의 빛이 비추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새 길을 만나게 됩니다.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여러분 신앙의 문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나랑 다르게 믿는 낌새가 느껴지면 그 거부감이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우리 신앙 안에 우리를 가둬 버리는 것이지요. 사울은 이런 상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야기는 사울이 자기에게 그토록 익숙하던 것과 결별하고, 전혀 낯설게 여겨지는 세계로 한 걸음 성큼 들어서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울이 주님과 대화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모르는데, 예수님은 사울을 안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난 예수 때문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귀만 들립니다. 사울의 귀에 이런 음성이 다가와 꼽힙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9:4b)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길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을 살리는 길이며, 동족을 신앙적으로 지켜내는 일이라고 그렇게 믿고 행동했습니다. 그의 삶이 신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자신이 한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을 빌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일”이 고작 자신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이 들 때, 잠깐 멈추어 서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의지를 이루려는 것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정도 신앙생활 했으면, 이제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Re-orientation
이제 오늘의 이야기는 사울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변화는 새로운 길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고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다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단어 들어보셨지요? 회사나 학교의 새내기 신입생들은 오리엔테이션을 합니다. ‘오리엔테이션’은 동쪽과 관련 있는 단어입니다. 동양을 오리엔트라고 하잖아요? 동쪽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나요? 빛입니다. 해가 떠오르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길을 잃으면 해가 떠오르는 곳을 기준으로 삼아서 다시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무엇을요? 다시 나갈 길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방향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도를 믿는 사람들,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은 이제는 유대 종교 신봉자인 ‘사울’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나아갔던 ‘바울’의 전도 여행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위대한 이 선교의 여정 전에 그는 Orientation을 새로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가는 사울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손은 사람들의 손에 꼭 붙들려있어야 합니다. 발은 있지만 자기 맘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9절) 이 장면으로 무엇이 연상이 됩니까?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사흘 간 누우셨던 예수님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한 인간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사울도 죽음과 같은 사흘을 보내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기독교 최고의 박해자에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복음전도자가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참 신앙은 사람을 변화로 인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가요?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사울이 하던 짓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사람들을 향해서 더 크게 마음을 열고, 두 팔을 벌려 맞이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나를 키우는 일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나이를 들면요. 그러나 신앙은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나를 진정으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여기며 견고하게 지니고 있던 울타리 너머를 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역시 신앙의 일입니다. 이 일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몰랐던 하나님과 이웃의 면모를 발견하는 일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러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