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성령강림 후 제16주 (2023년-38호)

제목 : 사람! 사람! 사람!
본문 : 마가복음 2장 23-28절, 3장 1-6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 손을 내밀어라. »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인사합시다.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선하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참 평화가 우리와 온 세상에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예배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한 말씀 먼저 드립니다. 이렇게 아파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겪는 병치레였습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들이 세계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모로코’에서 지진이 난 이후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정확히 파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북아프리카 국가인 ‘리비아’에서 홍수로 인해 수 천 명이 사망 또는 지중해 바다로 쓸려 내려갔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하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품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유가족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가의 시작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오늘의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마가복음을 탁 펼쳐놓고 앉아있으니 마가복음 특유의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가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가장 짧습니다. 마태는 28장이나 되는데, 마가는 16장 정도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예수 탄생이야기가 없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내용이고,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 예수 성탄 아닐까요? 그런데 마가는 과감히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끝맺음도 간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고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그냥 “복음의 시작” 이렇습니다. 복음서 마지막은 어떨까요? 예수님 부활사건도 이렇게 맺어버립니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누가, 무엇을 들고 무덤에 찾아가고… 이런 많은 부활 사건 이후의 많은 이야기들이 다 축소되어 있는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 본문이 짧다고 그 말씀의 위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러분도 이미 실감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짧은 위로 한 마디에 세상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그 반대로 짧은 말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말씀의 구조 (첫 단락)

오늘 말씀은 먼저 지난 8월 첫 주일에 설교를 상기해야 합니다. 8월 첫 주 설교에서 저는 예수님 옆에 붙어서 높은 자리를 요청하는 두 제자이야기와 곧이어 이어지는 두 명의 눈 먼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같이 읽게 되면 “진짜 눈먼 사람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기억나시죠?

이 말씀 구조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구조도 비슷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두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단락입니다. 첫 단락(2:23-28)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밀밭 사이를 지나갑니다. 마침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제자들 몇이 밀 이삭을 잘랐고, 그것이 시빗거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이 무엇일까요? 가난입니다. 그것도 극심한 가난입니다. 가난을 생각해본다면 제자들의 그런 행동은 아마도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남의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 노동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날 때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제단 빵을 먹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은 일종의 도발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있는 이유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안식일 법이어야 하는 것,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율법의 굴레에 갇혀 살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을 법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법이 무기가 되고, 법을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키나 안지키나 두 눈을 부릅뜨고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빅 브라더’ 라는 거대한 감시체계가 있습니다. 국가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 하나, 표정 하나까지 감시하는 전체주의 국가 체제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이 무엇을 하는 지, 어디를 가는 지를 하나하나 감시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끔찍하지요?
예수님과 일행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나? 무슨 위법한 행위를 저지르나?’ 하고 지켜보는,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바리새파 사람들에 비해 율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유대인으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무리입니다. 그야말로 무식한 촌부들이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긴 이런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의 구조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단락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다르게 말하면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일행입니다. 회당 구석에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의미 구하기

지금 우리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읽었습니다. 두 개의 말씀은 서로 다른 말씀입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 준수와 이것을 어기고 계신 예수님과 일행”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정이 비뚤어져서 고의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소년처럼 일부러 어깃장을 놓고, 유대 율법을 일부러 어기는 것이 아니지요.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어깃장 놓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어깃장 놓기’가 맞습니다.
여러분, 어깃장 놓는 게 뭔지 아세요? 예전에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서 집의 문을 만들 때 나무를 다듬어서 길게 이어 붙였습니다. 세로로 연결된 나무판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가로로도 넓게 이어붙입니다. 그리고 나서 ‘대각선으로’ 긴 나무를 붙입니다. 이해되셨습니까?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니게 대각선으로 나무를 붙여 놓는 이유가 뭘까요? 추운 겨울 날씨, 비바람, 눈보라와 햇빛을 번갈아 맞으면 가로 세로로 붙여놓은 문짝이 휘어집니다. 문짝이 휘어지면 문의 기능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문은 있으나마나 합니다. 그래서 어깃장을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깃장을 놓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온전히 있지 못하고 비틀어지고, 왜곡되고, 사람들을 벌 내리는 근거로 작용하는 현실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어깃장 놓으신 게 맞습니다.

이 두 개의 에피소드는 다른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만 또한 같은 주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 법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선언에 모두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신 분입니다. 참되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법이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감시하고 지적하고 벌 내리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을 예수님은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안식일 법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안식일의 기원을 굳이 따지자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그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다음 쉬셨듯이 사람도 쉬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과 휴식을 병행합니다.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고대사회의 노예들에게 휴식이 보장되는 삶이란 있었을까요? 당연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그냥해보는 빈말이 아니라 진실하다면, 그리고 진심을 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안식일법의 본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창세기는 선언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 온 천지만물과 사람은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는 것을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토우브’는 ‘기분 좋다’, ‘선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이 기분이 좋으셨답니다.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시고서는.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서 갖는 하나님의 첫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래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기분 좋음’에 동참하는 것이 ‘사람의 사람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쓸모로만 인식할 때 기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올라와 있는 잡초 풀 하나가 쓸모가 있나요? ‘내게 이득이 되나 안되나’ 이런 시선은 사람을 점점 병들게 만듭니다.

-피조물의 신음

우리가 사는 세상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의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이런 신음에 응답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도 일상에 매인 채 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6,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라’는 말은 감각기관인 눈으로 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보다’, ‘숙고하다’라는 뜻입니다. ‘살펴보라’는 말은 ‘주의 깊게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세상에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거짓된 경건

안식일을 둘러싼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그곳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과연 그가 환자를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병든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할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지에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사회적인 불편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이 겪는 구체적인 아픔은 늘 남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의 현실에 대한 어떤 이론을 세우거나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다만 동행이 되어주고, 돌보아 주실 뿐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종교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였습니다.

주님이 가장 미워하신 것은 ‘자기 의’였습니다. 거짓 종교의 특색은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 줍니다. 신앙은 거짓된 자아로 똘똘 뭉쳐졌던 내가 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짓된 자아를 부풀리는데 종교처럼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을 정죄하는 데 재빠르고, 편협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좋은 신자들입니다. 주일 성수도 잘하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에도 열심입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이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 기초하지 않을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육신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이웃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증명합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십니다. 이름조차 없는 사람 하나를 사람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그를 가운데 세우신 것이 그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마치 예수님이 도발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묵묵부답입니다. 관습에 매인 그들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함정에 빠진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주님은 이 질문으로 그들의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다고 전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몇 안 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 경건은 사람을 따뜻하고 정겨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거짓된 신앙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냉혹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심으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에 초기에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즉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고 안식일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세속의 삶을 사는 동안 마모된 우리 영혼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광채를 되찾아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마치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저도 도발 한 번 해봅니다. 왜 이렇게 모여서 시간과 정성과 돈을 들입니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예배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질서 속에 속한 내가 하나님 피조물인 사람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아닐까요?
내 옆에는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밖에 나가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인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그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누군가의 피폐해진 삶을 구하는 일을 나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리새파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제자들이 손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손으로 밀 이삭을 잘라먹는 안식일 법 위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정말로 손이 말라버려서 남을 향해 내밀 마음의 손, 영혼의 손을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삶을 자각하고 마음을 품는 우리 파리중앙 성도들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