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7일 성령강림 후 제24주 (2021년-45호)

제목 : 과부의 두 렙돈
본문 : 열왕기상 17:8-16, 히브리서 9:24-28, 시편 127편, 마가복음 12:38-44

【열왕기상 17:8-16】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 먹을 것도 조금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 여인이 말하였다. «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말씀하셨습니다. »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인과 엘리야와 그 여인의 식구가 여러 날 동안 먹었지만,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마가복음 12:38-44】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함께 서로 인사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위해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여러분, 지난 한 주간 주님과 함께 하셨습니까? 단 한 순간이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임마누엘의 체험이 여러분 삶에 있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시작이 되셨던 존 웨슬리의 마지막 말은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일”, 곧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의 말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절기상 입동이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겨울로 들어서는 날입니다. 옛날에는 입동이면 김장을 준비하는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요즘은 김장을 담구는 일이 흔하지 않지만 먹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 한 겨울 내내 먹을 기본 음식인 김치를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사람만이 아니라 동면에 들어가는 동물들도 겨우내 먹을거리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추위를 피할 굴이나 처소를 준비하고 몸에는 많은 음식을 먹어서 비축합니다. 동물들은살기 위해서, 겨우내 살아내기 위해서 이렇게들 애를 씁니다.사람도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먹을 거리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무엇을 준비하는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살필 수 있어야겠습니다.-분단 그 이후오늘 구약의 말씀은 열왕기상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열왕기서 말씀 속에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고, 이 역사 속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역사책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인 한국사, 세계사 이런 역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열왕기서는 특별한 관점이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 즉 특별한 시선으로 본 이스라엘-유다 역사입니다. 책 제목이 ‘열왕기서’입니다. 말 그대로 ‘왕들의 나열’을 말합니다. 왕이 10명이 아닙니다.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융성하고 창대했던 시절을 ‘다윗왕 시절’이라고 말합니다.그나마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시대까지는 그 영화로운 기세가 다소 진행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나라의 체제도 갖추고, 국토도 엄청나게 넓혔습니다. 왕궁도 짓고,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도 지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시절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습니다.하지만 이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면 나라가 두 동강이가 납니다. 아들들이 권력 암투가 일어나고 흔히 말하는 ‘왕자들의 난’이 일어납니다. 여느 고대왕조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 다툼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갈라섬’입니다. 분단입니다.우리 민족을 보십시오. 우리 민족 역시 ‘이데올로기 갈등’과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틈바구니에서 ‘분단’되었습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나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서로 갈라져서싸우게 되고 이 분단을 지탱하느라 엄청나게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것 뿐이겠습니까? 서로오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의 낭비가 엄청납니다.

-엘리야의 시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이스라엘-유다 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분단 이후에 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은 유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예언자‘엘리야’는 북쪽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이 엘리야 선지자의 활동 시대의 왕은 ‘아합왕’ 시대입니다.여러분,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숙하시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할때의 그 시대가 이 ‘아합왕’(주전 871-852)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합왕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나요?누구나 평가를 받듯이, ‘아합왕’도 역사의 평가 대상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합’에 대한평가는 이렇습니다. 첫째,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왕상 16:31) 여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무엇이 여로보암의 죄고, 아합은 이보다 더하다고 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왕국의 이념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상징물이 필요하다고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 나라에는 예루살렘이 있고 성전이 있으니, 북쪽 이스라엘에는강력한 여호와의 상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꺼내든 상징물이 있습니다.바로 송아지입니다. 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의 상징으로 선택했습니다. 금송아지가 하나님의대체물이 되었고, 국가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타락, 어긋남이 아무렇지도않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그런데 역사서 역할은 하는열왕기서는 아합왕은 여로보암의 죄를 앞질렀다고 합니다.둘째, 당시 수도였던 곳에 아합왕, “그는 사마리아에 세운 바알의 신전에다가, 바알을 섬기는제단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도 만들어 세웠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심하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왕상 16:32-33) 유사한 말씀입니다.이 시대가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엘리야는 하나님의귀하게 사용하시는 종입니다. 하지만 엘리야 한 사람을 놓고 볼 때는 고달픈 삶입니다. 도망다니고 숨어 지내야 하는 예언자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17장의 앞부분을 읽어 보면, 엘리야는 요단강 동쪽의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냅니다. 왜요? 아합왕의 눈을 피하여 숨은 것이지요. 거기서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것을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땅도 가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말라버렸습니다.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사르밧의 과부

그리고 우리는 오늘 말씀에 도달했습니다. 엘리야는 ‘시돈의 사르밧 지역’으로 옮기라는 말씀을 따라 이동합니다. 이 엘리야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 된 시돈의 사르밧 지역의 한 과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이 곳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과부’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남편을 잃은 여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성경에 ‘과부’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아하! “사회적 최약계층,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필이면하나님은 이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기대하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니, 이 모습을 우리가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실제로 여인은 빵 한 조각 준비된 것은 없고, 다만 밀가루 한 줌, 그리고 기름 몇 방울만이남아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17:12) 이렇게 말할 처지의 여인이었습니다.
혹시 엘리야가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시돈지역에 사는 과부가 이 여인 하나뿐일 리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압니다. 이 여인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여인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문제는 여인이 남을 도울 처지가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말합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13-14)참 몰인정한 부탁이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그 염치없어 보이는 엘리야를 질책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엘리야의말대로 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고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산상으로 이득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따라 그렇게 결정했지만, 하지만 이 여인을 이끈 것은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드리는 일입니다.

-과부의 손에 들린 것

자! 사르밧 과부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이었습니다.이 여인의 눈에도 얼마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지모르겠습니다만, 쌀독이 비어버린 경험입니다. 쌀만이 아니겠지요. 이런 상황이 되면 비참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이 찾아옵니다.비참한 운명 앞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과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이런 비참한 운명에 놓인 사람 둘을 불러서 명령하시니 그들이 먹을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의 손에 들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딱 밀가루 떡 한 두 개의 재료입니다.오늘 마가복음 12장으로 가보십시오. 이곳에서도 가난한 과부 한 명이 등장합니다. 자! 여러분, 이 과부의 손에 들린 것을 보십시오. 렙돈 두 닢입니다. 렙돈은 가장 작은 단위의 그리스구리 동전을 말합니다.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형편없이 작은 금액입니다. 손에 들린 ‘두 렙돈’ 역시 사르밧 과부의 남은 것과 마찬가지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금액임에는 분명합니다.그런데 이 장면을 예수께서 보고 계셨습니다. 하필이면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헌금을 얼마를 하나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입니다.‘무리가 얼마를 헌금함에 넣는가’를 보시는 게 아닙니다.예수님의 시선에 잡힌 장면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과부의 손에 들린 ‘두 렙돈’입니다. 그리고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가진 것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두 개의 과부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가난하고, 볼품없는 여인, 세상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여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와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과부의 손에 들린 것은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 그리고 두 개의구리 동전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물질을 세상의 가치로 평가하시는게 아닙니다.과부의 비참한 삶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손길을 거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아야 하고 보여야 합니다. 자신의 전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곧 그녀가 자신의 인생, 즉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즐비하다

신약과 구약의 이 두 말씀이 우리에게 상기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일까요? 혼히 말하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광야에 많은 이들이 모여 앉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를 통해서 주님의 손에 들리운 것이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이것은 볼품없는 음식입니다. 요한복음 6:9의 말씀에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자만 5000명이 모여 있는데, 겨우 이걸로 무엇을 합니까? 이것은 제자들의 시선, 우리의 시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면 달라집니다.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리우면 무슨 일이벌어지는지 입니다. 사람의 몸도 성장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눈을 뜨면 뜰수록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세상적인 평판, 가치 판단, 이런 것도 중요한 세상살이 이치라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눈에 볼 때, 초라하고 작아도,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이것이 어떻게 되는지를 볼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 과부의 모습과 비교해서어떤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예복을 차려입고,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상은 가장 좋은 것을 받고, 남들 볼 때 길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과부들의 가산을삼키는 사람을 대비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세상살이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기 위해 달려 나갈 때 우리의 신앙의 눈은 흐려집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렇게 헌금이나 물질을 바치는 말씀을 읽으면 뭔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어쩌면 여러분은아무렇지도 않은데, 목사인 제가 지레 겁먹고 불편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이 결국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처럼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과부를 칭찬하셨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그런 돈을 헌금하지 말라고 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헌금 자체, 헌금 액수를 말씀하는 게아닙니다.
헌금에 대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드려야 한다는 말은 많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은 헌금이 아닙니다. 이것은 큰 오만입니다. 또 우리교회에서 나만큼 헌금하는 사람이있으면 나와 바라 하는 태도로 헌금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이런 일은 흔히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이고, 우리가 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헌금 몇 푼만떼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다는 말처럼 영적으로 오만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여기서 필요한 것은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용기입니다. 헌금을 무조건 많이 하라는 게 아니라 생존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처한상황에 따라서 다 다를 것입니다.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순간들,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우리는 요구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바다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폭이 얼마나 크신데 우리가 뛰어들기를 주저합니까?
하나님과 언제까지 데면데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께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전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만나며 사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내맡기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고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