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상 1:4-20, 히브리서 10:11-14, 19-25, 시편 16편, 마가복음 13:1-8
【마가복음 13:1-8】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거룩한 주님의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오 늘 말씀을 나누는 시간, 먼저 주변의 교우들과 반갑고 친절한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교회에서는 예배 후에 떡을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로 감사하고, 즐겁게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 시간표에 따르면 올 한 해의 <마지 막 주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예배를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주제”로 드릴 수 있어서 참으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생도 결국에는 내가 모은 재산 통장 잔액 바라보면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또는 내가 얻은 명예나 지위를 지닌 채로 마무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은 감사로 마무리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는 인생이지 않을 까 싶습니다. 사람이란 결국 누군가의 도움과 누군가의 배려와 누군가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살아나가는 것이기에 우리가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 사이에도 감사로 연결되는 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감사주일 21일이 지나면 올해 11월 마지막 주일은 교회의 첫 주일로 시작합니다. 이 시간 성 탄 전까지의 4주간을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시간을 기다림이라는 행 위로 시작합니다. 기다림에는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움, 간절함입니다. 주님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여러분은 하루의 시작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합니까? 우리 맘에 그리움과 간절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시인은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 다.”(119:105) 주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 여러분의 외롭고 험한 인생의 길을 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예수님
오늘 복음서 마가복음 13장 1-8절의 말씀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읽은 말씀 잘 기억하고 계시지요? 오늘 말씀을 읽고 난 첫 느낌은 어떻습니까? 떠오르는 단어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징조, 끝, 전쟁, 기근, 진통 등 왠지 모를 불안감을 일으키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요?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말씀의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3장에 이르렀습니다. 이 곳은 어디인가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 일행은 지금 예루살렘에 도착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간 말씀을 읽어오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걷고 계신, 즉 길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길 위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도중에 부자 청년(‘영원한 생명을얻으려면’이라고 질문했던)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번이나 죽음과 부활을 예고 하셨습니다. 또 두 형제 제자 야고보와 요한으로부터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달라”는 어리석은 요청의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착 직전 ‘여리고’에서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사건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뭔가 긴장감 고조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과 일어난 일들과 점점 긴장감을 상승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성전 또 성전
이제 드디어 11장에 이르면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관광하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유명하다는 곳에 가보고, 맛집 탐방하려고 가시는 것이 아니지요. 11장 1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관광하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이 되어야 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성전에 있습니다.
이튿날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야말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신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시선은 하나님의 성전이 망가진 것에 가있습니다.
우리들의 시선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준, 신앙의 초점은 ‘주님이시라면…’입니다. 선택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나 신앙과 관련하여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할 때 ‘주님이시라면…’하고 떠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다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온통 ‘아버지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성전을 나오시다
간략하게나마 앞의 사건들에 관해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실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2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빠져나오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3-8절은 성전 밖의 동편 뒷동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리브 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올리브 산을 따라서 내려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긍휼의 집, ‘베다니 마을’이 나옵니다. 첫 단락에 보면 성전을 빠져나오고 있는 예수님의 일행의 모습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예수님의 시선은 하나님 예배의 자리 성전, 성전 제도, 성전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보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가 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성전 건물에 시선이 가 있습니다. 어떤 장면인지 아시겠지요? 성전에서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은 다 놓치고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있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한 제자뿐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갈릴리 촌사람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 건물 크기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지탱하고 있는어마어마한 크기의 돌들에 놀랐을 것입니다.
이런 것에 시선을 빼앗겨서 정작 성전에서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한 채로 성전을 빠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건축물 보셨지요? 인류는 아주아주 옛날로부터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 종교적 권위를 강화해보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그런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이 헤롯 성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예상 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재난의 징조
이 말씀이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쉬려고 물러났던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이 예수께와서 묻습니다. 오늘 말씀 3-8절의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다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4절)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어떤 건축물이 운명을 다해서 사라지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유대사람들에게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세상의 종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경험이고, 세상의 끝 날에 가서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묵시사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한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경험들을 이미 가지고있기 때문입니다.
-묵시사상
유대사람들은 기원전 587년에 세상 마지막 날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이 어떤날입니까? 이 날은 솔로몬이 지었던 영원할 것 같았던 성전이 바빌론 사람들에게 완전히 불타서 무너지는 일을 이미 경험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믿었던 성전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성전 기물들은 이방인인 바빌론 사람들이 약탈해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죽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인해서 기존의 모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허물어졌습니다.
가장 크게흔들린 것이 무엇일까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바빌론에게 파멸을 당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냈습니다. 이것을 묵시사상이라고 합니다. 이 속에 세상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세상의 끝 날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영원합니다.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생각일 수 있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지상의 하나님의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백성과 의로운 사람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 고난과 재난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간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국 파멸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세상의 끝 날 입니다. 이 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자신들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와야만 이 세상의 기존 질서가 해체되고 악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메시아사상이 본격화 됩니다.
-세상의 끝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묵시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눈에 좀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지만,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아주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크고 작은 묵시적 대파국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소소하게는 여러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젊음이 사그러드는 것을 보십시오. 젊어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우리의 신체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저기 삐걱거립니다. 인간의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끔찍한 테러 사건이었던 ‘바따끌랑’ 앞에서 6주기 추모식을 여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제외한 채로,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저 별들도 자신의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별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이런 말로 인해서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러니 될대로 되라는식으로 쾌락에 빠져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묵시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망해버릴 거니까 나 몰라라 하자거나, 거꾸로 거기에 탐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관점
여기에는 두 가지 신앙의 관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지나가고
뿌리 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뚫어보는 사람은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삶을 유일회적인 기회로 알고 소중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삶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말 그대로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풍성하게 살지못하고 주눅 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또 남들을 삐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편견과 편협으로 똘똘 뭉친 채로 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바따끌랑 테러 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앙투앙 래리(Antoine Leiris)라는 분이 쓴 글을 최근에읽었습니다. 이 분이 누구에게 편지를 썼는가 하면 그 테러리스트에게 쓴 편지입니다.
“당신들은 내가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길 바라겠지만, 내가 증오로 답한다면 당신들과 똑같은 무지한 인간이 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신들은 작은 승리를 거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내가 날마다 우리와 함께할 것임을, 당신들은 절대로 가지 못한 자유로운 영혼들이 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임을 알고 있다. 난 더이상 당신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난 지금 막 낮잠에서 깬, 갓 17개월 된 내 아들에게가야한다. 아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을 것이고, 언제나 처럼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것이다. 내 이 작은 아이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삶으로서 당신들을 괴롭힐 것이다.”
어떻습니까? 이 글을 쓴 분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이 젊은 아빠의 말 가운데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곧 테러리스트의 승리는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이고, 또 죽은 아내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또 하나 더하자면 지금 살아가는 내 삶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맺음말
교우 여러분! 앞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대했던 단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징조, 끝, 전쟁, 기근, 고통’ ‘종말론, 묵시사상’ 이런 단어들은 사람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노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영원한것이 아니니 영원하신 분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은 의미 없이 지나버릴 하루가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하루로 알고 귀중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을 영원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종말론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닥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오늘 하루가 마지막 하루처럼 소중한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아멘.
